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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시

안토니오 마차도, 유년의 추억 - 레몬나무와 분수

by brasero 2021. 1. 31.

우리 모두 영혼이 맑은 어린이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면서 탁해져서 그런지 순수했던 유년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어릴 때를 회상하면 항상 순백의 화폭이 펼치지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마다 유년의 추억이 다를 것이다. 기쁨이나 설렘보다 아픔, 서러움, 슬픔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래 기형도(1960~1989)의 시 <엄마 생각>에는 걱정, 무서움, 쓸쓸함, 서글픔이 들어 있다.

엄마 생각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한편 서정주(1915~2000)의 <첫사랑의 시>에는 설렘과 희망이 있다. 

첫사랑의 시

초등학교 3학년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 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밭에 놓아 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우리의 전통 운율에 모더니즘을 조합한 정지용(1902~1950)의 시 <무서운 시계>, <향수>, <말>과 같은 시에도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복귀되어 있다.

무서운 시계

오빠가 가시고 난 방안에
숯불이 박꽃처럼 새워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

망토 자락을 녀미며 녀미며
검은 유리만 내여다 보시겠지!

오빠가 가시고 나신 방안에
시계소리 서마 서마 무서워.

한국에 모더니즘을 도입한 정지용,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서정주, 그리고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기형도의 시에서 성년이 된 시인들의 유년이 소환되어 있다. 순수했던 과거를 복원함으로써 덧없는 시간에서 오는 불안과 좌절을 치유한다.

스페인 상징주의 모더니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의 아래 시도 유년에 살았던 세비야의 집 정원에 어린 추억이 구원처럼 떠올라 허무로부터 시인을 구출해 주고 있다. 시의 전문이다.

7

노곤한 레몬나무
창백한 먼지투성이 가지 하나
마법에 홀려 분수 위로 늘어져 있고
저기 바닥에 황금빛 열매가
꿈을 꾼다...

맑은 오후이다
얼추 봄이다
멀지 않은 사월의 훈기가 실려오는
포근한 삼월 오후
나는 혼자 적막한 뜰에서
순진한 옛 소망을 찾는다
흰 벽 위에 그늘이나
잠든 분수의 돌 울짱에 추억이나
공중에 흩날리는
가벼운 옷자락을

오후의 뜰에
부유하는 부재의 향내가
명석한 머리에게 말한다,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지만 가슴에게 말한다, 기다리라고.

향내는 동정녀와 죽은 자의 향기가 나는
유령을 불러온다

그래, 너를 기억하지, 즐겁고 맑은 오후
봄이 지척이고
꽃이 피지 않는 오후 그때 내게 가져다주었지
내 어머니가 화분에 키웠던
향내 나는 박하와
상큼한 향의 바질을

마법에 홀린 열매를 건지려고
잠잠한 물에 잠긴 하얀 내 손을
너는 보았지
지금은 분수 바닥에 꿈을 꾸는 열매.

그래, 즐겁고 맑은 오후 너를 알아
얼추 봄이었던.

VII

El limonero lánguido suspende
una pálida rama polvorienta
sobre el encanto de la fuente limpia,
y allá en el fondo sueñan
los frutos de oro...

Es una tarde clara,
casi de primavera,
tibia tarde de marzo
que el hálito de abril cercano lleva;
y estoy solo, en el patio silencioso,
buscando una ilusión cándida y vieja:
alguna sombra sobre el blanco muro,
algún recuerdo, en el pretil de piedra
de la fuente dormido, o en el aire,
algún vagar de túnica ligera.

En el ambiente de la tarde flota
ese aroma de ausencia,
que dice al alma luminosa: nunca,
y al corazón: espera.

Ese aroma que evoca los fantasmas
de las fragancias vírgenes y muertas.

Sí, te recuerdo, tarde alegre y clara,
casi de primavera,
tarde sin flores, cuando me traías
el buen perfume de la hierbabuena,
y de la buena albahaca,
que tenía mi madre en sus macetas.

Que tú me viste hundir mis manos puras
en el agua serena,
para alcanzar los frutos encantados
que hoy en el fondo de la fuente sueñan...

Sí, te conozco, tarde alegre y clara,
casi de primavera.

마차도 유년의 집 정원과 분수 

알바 공작 부인의 저택 (엘 팔라시오 데 두에냐스 El Palacio de Dueñas)의 일부 건물을 세를 얻어 살던 세비야 집을 방문해 레몬나무와 분수를 보고 떠오른 유년의 기억을 적은 시이다. 어릴 때 보았던 레몬나무가 분수 위로, 노곤하게 먼지투성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물에 황금빛 레몬이 비친다. 따스하고 맑은 삼월에 순박했던 아이의 소망, 그늘, 분수가 환기되고 가운 (튜닉 túnica)의 옷자락이 가볍게 흩날린다. 막연한 사랑의 감정, 이름 모를 여인의 옷자락이 생각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잠인 듯 꿈인 듯한 몽상에서 찾았던 여성처럼 말이다.

오후 정원에 부재의 향기가 부유한다. 부재는 비어 있는 공허감이나 허무감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린 날에 목격했던 정원의 색과 향기와 같은 구체적인 대상이다. 잊혀진 유년을 떠올리고 싶은데 의식이란 이성은 허락을 하지 않지만 느낌이란 순수 감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한다. 어릴 적 성당의 동정녀와 죽은 자들의 향기가 유령이 되어 환기된다. 어른이 되어 되살아난 유년의 동정녀와 죽은 자들은 시간을 거슬러 다가온 유령인 것이다. 그래도 오직 시인의 감성만으로 어제를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5연의 '그래, 기억이 돌아온' 유년의 오후 Sí, te recuerdo는 2연에 어른이 되어 서 있는 정원의 '어느 맑은 오후 Es una tarde clara'가 아니라 즐겁고 맑은 오후이다 tarde alegre y clara. 유년의 오후는 단순한 여느 날의 오후가 아니라, 친구처럼 tu 다정하고 즐거운 오후이다. 이제 생생하게 추억이 소생된다. 어머니가 키웠던 알바아카(바질)과 박하 향이 물씬 난다.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

물에 비친 레몬, 상징주의 시에서 순박함을 의미하는, 열매를 건지려고 하는 유년의 지고지순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풍경을 관조하며 떠올랐던 열매는 시간의 논리에 마법을 걸어 잠시 과거로 돌아갔다 깨어보니 열매는 물 안에 있다. 마지막 연에 유년은 5연처럼 기억한 것 te recuerdo에 그치지 않고, 즐겁고 맑은 그 오후로 잘 알고 있는 Sí, te conozco 대상이 되었다. 봄이 모퉁이에 있던 깔깔거리던 환한 유년의 오후는 세월을 건너뛰어 시인을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다.

시는 1903년 <시인이 고향 집의 정원을 방문하다 El poeta visita el patio de la casa en que nació>란 제목으로 잡지 ≪엘리오스≫에 발표되었고 수정을 거쳐 1907년 시집 <고독, 회랑, 다른 시>에 로마 숫자 VII로 게재되었다.

*마차도가 1875년 태어나 4세까지 산 집의 뜰과 정원 - 알바 공작의 저택, 팔라시오 데 두에냐스의 정원- 저택의 부속 건물을 일반인에게 세를 주었다. 영상에 저택의 내부는 마차도의 집이 아니라 공작의 저택이다. 이 집에서 4년 살다가 세비야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고 마차도가 8세 때 식구 전부가 마드리드로 이사를 했다. 

영상 표지는 마차도의 시 <자화상>의 첫 3행이다. "내 유년의 추억은 / 레몬이 익어가는 / 세비야의 뜰과 환한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