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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시

가시를 뽑았더니 가슴을 느낄 수 없다 - Yo voy soñando caminos 나는 꿈을 꾸며 길을 간다

by brasero 2021. 1. 8.

바란다. 이룰 수 없거나 가질 수 없다. 그러면 아프다. 우린 다 아프다, 다들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아픔을 치유한다. 그러면 아프지 않겠지만, 아프지 않은 딱 그만큼 때론 아픔보다 더 크게 어디인지 모르게 헛헛하게 빈 속이다. 열망과 실망, 바람과 아픔의 공존, 양립할 수 없는 것의 조화가 삶이고 사랑이다.

안토니오 마차도의 아래 시는 이런 불합리한 진리가 함축된 역설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 ≪고독, 갱도, 다른 시≫(1907)에 열한 번째로 제목 없이 실린 시다. 원래 1906년 잡지 ≪아테네≫에 <꿈>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다.

11

나는 꿈을 꾸며 길을 간다.
오후이다, 황금빛 언덕과
푸른 소나무들
먼지투성이 가시나무들!...
이 길은 어디로 가려나?
나는 노래를 부르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다...
오후가 저물고 있다.
내 가슴에 정열의 가시가
박혀 있어 어느 날
가시를 뽑았더니 더이상
가슴을 느낄 수 없다.

순간 들판이 모두 정지하고
입을 닫고 어둠이 내리고
명상에 잠기고 바람은
강의 버드나무를 스친다.

오후는 점점 저물어가고
길은 구불구불
희미하게 하얗게 변하고
흐릿하게 사라진다.

내 노래는 탄식으로 변했다.
뾰족한 황금 가시
너를 느낄 수 있으면
내 가슴속에 박힌 너를.

카를로스 카노(Carlos Cano) 노래- Yo voy soñando caminos

XI

Yo voy soñando caminos
de la tarde. ¡Las colinas
doradas, los verdes pinos,
las polvorientas encinas!...
¿Adonde el camino irá?
Yo voy cantando, viajero
a lo largo del sendero...
—La tarde cayendo está—,
"En el corazón tenía
la espina de una pasión;
logré arrancármela un día:
ya no siento el corazón."

Y todo el campo un momento
se queda, mudo y sombrío,
meditando. Suena el viento
en los álamos del río.

La tarde más se obscurece;
y el camino que serpea
y débilmente blanquea,
se enturbia y desaparece.

Mi cantar vuelve a plañir:
"Aguda espina dorada,
quién te pudiera sentir
en el corazón clavada."

전체 4연으로 구성된 시인데, 1연은 12행, 나머지는 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은 4행 단락으로 A , B, C 3개의 내부 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1A는 8음절 abab 각운 (caminos, colinas, pinos, encinas)의 사행 (cuarteta)이다. 1B는 8음절 cddc 각운 (irá, viajero, sendero, está)의 사행 (redondilla)으로 이루어져 있다. 1C는 8음절 efef 각운 (tenía, pasión,a, corazón) 사행 (cuarteta)이다. 3연은 1B 같은 각운의 8음절 사행시 (redondilla)이고 마지막 연은 1B와 1C와 같은 각운의 8음절 사행시(cuarteta)이다.

시인은 꿈을 꾸며 길을 간다. 꿈은 싱징주의가 물려받은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자연으로 도피해 천국을 창조하는 백일몽을 꾸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낙원을 건설하자는 상징으로 꿈이다. 실제로 시인이 꿈을 꾸며 가는 길인지 아니면 꿈이 길을 가는지 분명하지 않다. 발을 딛는 산책길일 수 있으나 마음속에 난 길이다. 꿈은 다리가 되어 상상으로 길과 연결되어 있다. 길은 마음의 여정이다. 오후에 시인의 고뇌가 희망으로 바뀌고 메마른 아픔을 치유하고 싶은 것이다.

오후이다. 빛이 만들어낸 풍경을 모네가 그린 인상주의 그림처럼 묘사했다. 풍경은 마차도의 시에 중요하다. 자연의 풍경은 마음의 풍경과 상관물이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의 배경인 자연에 내재한 리듬은 시인의 떨리는 영혼과 조화를 이룬다. 자연을 대하며 시인은 감정과 정서를 투사한다. 나무, 꽃, 숲, 물, 산, 들, 물, 바위, 바람, 태양에 감정을 이입한다. 해질 무렵이다. 언덕은 황금빛 노을이 물들었고 멀리 소나무가 푸르고 가시나무가 - 가시가 있는 나무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 서식하는 도토리가 열리는 늘푸른 잎의 참나무다 -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고단한 일상이지만 이상을 추구하며 가는 길,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모른다. 흥얼거리며 마음을 다독인다다. 해가 저문다. 열망이 있었는데, 이룰 수가 없어, 얻을 수가 없어, 가시처럼 아프다. 견딜 수 없어 가시를 뺐다. 고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가슴에 느낌이 오지 않는다. 그러자 밤의 어둠이 내렸다. 빛이 있으면 웃음이 나고 어두우면 위축되고 억압되는 것이라면 낭만적 해석이다. 밤은 잠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밤은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 시간이다. 어두워져 길이 보이지 않게 되듯 우리 인생은 꿈이 있어 고통이 구제된다. 밤이 있어야 세계가 완전해진다. 눈꺼풀을 내리고 잠을 자고 꿈을 꾸면 삶의 전체가 다시 활력을 얻는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되고 두려워하거나 아프지 않아도 된다. 보지 않으니 다시 태어날 필요도 없다. 영원히 잠을 잘 수도 있다.

내 노래가 탄식이 되어버렸다. 땅이 밤의 기운으로 소생하듯 우리의 가슴은 잠을 자고 꿈을 꾸기 때문에 재생한다. 쉬고 나면 힘이 솟고 몸이 가볍고 즐겁듯이 고뇌하며 울던 눈은 밤새 치유가 된다. 시인의 가슴은 땅이 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규정했다. 잠과 꿈으로 세계가 제모습을 찾고 우리는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밤은 중단이고 휴식이고 아침이면 빛과 삶이 시작된다. 아프더라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가시로, 아픔으로 겅더리되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랑도 열망도 사라질 테니까.

그렇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고 진실한 사랑은 고통이다. 그렇기에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게 이별한다. 이별해서 새 사랑을 하더라도 그 사랑은 이룰 수 없던 옛사랑을 이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사랑의 발치에 진달래꽃을 뿌려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모순이다. 어차피 앞뒤가 맞지 않은 게 사랑이고 열망이고 삶인 것 같다.

사랑은 모순 덩어리이다. 처음 사랑을 정립하고 이 사랑이 실패로 끝나고 다음 사랑에 이전 사랑과 다른 반정립을 하는 데도 더 나은 사랑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쩌면 정립과 반정립을 대등하게 해야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성이 초월하려면 모순이 되는 정립과 반정립을 대등하게 볼 수밖에 없는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처럼 진실한 사랑은 아픔과 열망이 똑같은 양과 힘으로 작동해야 하는 내적 모순이 있나 보다.

마차도 위 시는 낭만주의 시인,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Rosalía de Castro,1837~1885)의 시 <예전에 못이 박혀 있었다 Unha vez tiven un cravo>(1880)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아래는 시 전문이다.

예전에 못이 박혀 있었다

예전에 한번 가슴에
못이 하나 박혀 있었어.
황금 못인지 쇠못인지 사랑의
못인지 벌써 잊어버렸다.
아주 깊게 상처를 주었고
매우 괴로워했고
예수님의 수난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듯
낮이나 밤이나 울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주님, 제발 진심으로
신께 한 번 빌었다
못을 단번에 뽑아 버릴
용기를 주시옵소서”
신이 말했다, 뽑아버려라,
하지만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후 난 괴롭지 않았고
그것이 고통인지도 몰랐다.
못이 빠진 곳에
무엇이 없는지 몰랐다.
아마 그 아픔이 사라져
서운했던 것이리라.
오 인자하신 신이여!
영혼을 감싸는 이 운명 같은 진흙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니, 주님!

Una vez tuve un clavo

Una vez tuve un clavo
clavado en el corazón,
y yo no me acuerdo ya si era aquel clavo
de oro, de hierro o de amor.
Sólo sé que me hizo un mal tan hondo,
que tanto me atormentó,
que yo día y noche sin cesar lloraba
cual lloró Magdalena en la Pasión.
"Señor, que todo lo puedes
-pedile una vez a Dios-,
dame valor para arrancar de un golpe
clavo de tal condición."
Y diómelo Dios, arranquelo.
Mas... ¿quién pensara?... Después
ya no sentí más tormentos
ni supe qué era dolor;
supe sólo que no sé qué me faltaba
en donde el clavo faltó,
y acaso... acaso tuve soledades
de aquella pena... ¡Buen Dios!
Este barro mortal que envuelve el espíritu,
¡quién lo entenderá, Señor!...

아래는 갈리시아어 원본이다.

Unha vez tiven un cravo

Unha vez tiven un cravo
cravado no corazón,
i eu non me acordo xa se era aquel cravo
de ouro, de ferro ou de amor.
Soio sei que me fixo un mal tan fondo,
que tanto me atormentóu,
que eu día e noite sin cesar choraba
cal choróu Madalena na Pasión.
“Señor, que todo o podedes
-pedínlle unha vez a Dios-,
dáime valor para arrincar dun golpe
cravo de tal condición”.
E doumo Dios, arrinquéino.
Mais…¿quén pensara…? Despois
xa non sentín máis tormentos
nin soupen qué era delor;
soupen só que non sei qué me faltaba
en donde o cravo faltóu,
e seica..., seica tiven soidades
daquela pena…¡Bon Dios!
Este barro mortal que envolve o esprito
¡quén o entenderá, Señor!… (시집 Follas novas, 1880)

안토니오 마차도가 갈리시아 시인,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의 진가를 발견한 것이다. 아프니까 사랑이고 삶이라는 주제로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는 마차도처럼 신비하게 아픔의 가시를 빼는 대신 신에게 기원해서 마음의 못을 뽑았다. 시의 말미에 절대자에게 다시 귀의하고 있다. 로살리아에게 혼외 애인이 있어다는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 이 시는 사랑의 아픔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두 시에 공통적으로 쓰인 동사 arrancar를 보자. arrancar는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의 시에 두 번, 마차도 의 시에 한 번 사용되었다. 마차도의 시에 가시 espina는 arrancar하지 않고 'Hay que sacarse esta espina (이 가시를 빼야 해)'처럼 sacar (뺀다)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arrancar는 큰 것을 제거하거나 뿌리째 완전히 파버리는 것이다. 로살리아처럼 arrancar라는 동사를 시어로 선택했다. 마차도가 즐겨 읽었던 낭만주의 시인 베케르 (Bécquer, 1836~1870)가 "Como se arranca el hierro de una herida (상처의 쇠뭉치가 뽑아지듯)"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