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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시

옛 사랑의 빛과 그림자, 미인, 아름다움의 상징- 안토니오 마차도의 시, 어두워진 거리 La calle en sombra

by brasero 2020. 12. 27.

15

어둠이 내린 거리. 높은 집들에 가려 햇살은
죽어가고 발코니에 빛이 메아리친다.

꽃이 놓인 아름다운 발코니에
갸름한 장밋빛의 낯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니?

유리창에 반사된 헛모습은
낡은 은판 사진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거리에는 네 발자국 소리만 들리고
석양의 메아리는 서서히 사그라진다.

아, 미어지는 가슴, 무겁게 저려오고.... 그녀일까?
그럴 수 없어.... 걸어가 사라진다.... 파랗게 별이 되어.

XV

La calle en sombra. Ocultan los altos caserones
el sol que muere; hay ecos de luz en los balcones.

¿No ves, en el encanto del mirador florido,
óvalo rosado de un rostro conocido?

La imagen, tras el vidrio de equívoco reflejo,
surge o se apaga como daguerrotipo viejo.

Suena en la calle sólo el ruido de tu paso;
se extinguen lentamente los ecos del ocaso.

¡Oh, angustia! Pesa y duele el corazón... ¿Es ella?
No puede ser... Camina... En el azul, la estrella.

 유리 전망대 발코니

오후 어스름 때 큰 옛집들이 즐비한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 햇볕은 집에 가려 죽어가고 집의 발코니에는 빛이 남아 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발코니의 전망대(mirador)에 내가 알던 익숙한 얼굴, 타원형의 장밋빛 얼굴이 언뜻 보인다. 그녀가 아니냐고 자신에게 묻는다. 하지만 유리에 비친 그 모습은 헛것이다. 생생하게 나타났다 빛바랜 은판 사전처럼 사라진다. 착란이다. 거리에는 네 발자국 소리, 시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리고 석양의 메아리는 천천히 사라진다. 그리운 얼굴을 본 것은 현실이 아니었고 꿈이었다. 가슴이 무너지고 먹먹해진다. 그녀일까? 그녀일 수는 없다. 환상이다. 그녀는 저만치 걸어가 사라진다. 파랗게 별이 되어 버렸다.

19세기 말 상징주의에 영향을 받은 시이다. 옛사랑을 회상하며 애통한 마음이 거리, 집, 발코니, 유리창, 은판 사진이란 물질과 태양, 빛(luz), 어둠(sombra), 황혼 (ocaso)이라는 자연현상에 투영되어 울창한 상징의 숲을 이루고 있다. 30세의 마차도가 결혼하기 전 잊었던 옛사랑을 기억하며 겪는 고통을 읊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34세 때 소리아에서 만나 결혼한 나이 어린 아내 레오노르(Leonor)도 아니고, 아내와의 사별 후 1928년 53세 때 만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마차도의 후기 시에 등장하는 시인, 기오마르(Guiomar, 본명, 필라르 데 발데라마 알다 Pilar de Valderrama Alday, 1889~1979)도 아니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조부마저 세상을 버리자 학업을 중단한 20대의 시인이 마드리드에서 생계를 꾸려가며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때 만났던 여자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ella는 살이 있고 피가 도는 실제 여자라기보다 마차도가 존경했던 모더니즘 시인 루벤 다리오 (Rubén Darío)의 시에 자주 쓰인 운율을 맟춘 ella이거나 정체불명의 신비한 미인(bella)이다. 이 미인은 아름다음(belleza)을 넘어 불멸의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령 루벤 다리오의 시집 《삶과 희망의 노래 Cantos de vida y esperanza》(1905)의 아래 시에서 ella는 bella와 estrella와 운율을 맞춘 미녀 또는 별을 뜻한다.

I

중략

En mi jardín se vio una estatua bella;
se juzgó mármol y era carne viva;
un alma joven habitaba en ella,
sentimental, sensible, sensitiva.

중략

Por eso ser sincero es ser potente.
De desnuda que está, brilla la estrella;
el agua dice el alma de la fuente
en la voz de cristal que fluye d'ella.

이런 명사를 지시하며 운을 맞춘 ella 대신 아래 <야상곡 Nocturno>이란 시의 마지막 연에 대문자 Ella는 전치 명사 악몽 pesadilla를 가리키며 동시에 불가해한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de ir a tientas, en intermitentes espantos,
hacia lo inevitable, desconocido, y la
pesadilla brutal de este dormir de llantos
¡de la cual no hay más que Ella que nos despertará!

더듬거리며, 간헐적으로 놀라며
어쩔 수 없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며
비탄에 젖어 이렇게 잠들어 무자비한 악몽
이것 너머에는 우리를 깨어 줄 그녀가 있을 뿐

이런 루벤 다리오의 운율을 위한 ella나 불가사의한 존재는 마차도의 위 시 ella와 다음 행의 estrella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면 마차도의 ella (그녀)는 아래 행의 별이거나, 모더니즘의 미학이거나, 불가해한 괴력난신이거나, 요정이나 그 밖의 신비로운 존재, 즉 당시의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에 반기를 든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심적 현상인 심령이거나 심지어 이런 심령을 가진 초월적 영혼을 뜻할 수 있다. 아무튼 ella는 모더니즘 시인의 마술봉에서 태어난 신묘한 상징이다. 

이런 상징을 잠시 접고 시를 이해하면 이렇다. 1연의 어둠이 내린 거리 (la calle en sombra)는 마차도가 걸었던 거리일 수 있지만, 누구든지 오가는 인생의 길을 상징할 수도 있다. 누구든지 가는 인생길, 때론 어둡고 확실한 게 없다. 인생이란 길에는 사건이나 일들이 집처럼 덩그렁 생긴다. 이런 집들이 밝은 길에 그늘을 드리우고 심하게는 아예 길을 죽여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집의 발코니에 남은 빛처럼 희망은 있다. 빛이 메아리 (ecos)가 되어 있다며, 시각이 청각으로 표현되었다. 2연, 사랑했던 사람이 발코니 유리창에 나타난 것 같다. 그 사람의 모습이 무거운 자음 -do으로 반복 (florido, rosado, conocido)되며 또박또박 떠오른다. 시인은 자신에게 묻는다. 갸름한 얼굴은 알던 얼굴이 아니냐고. 3연, 유리창에 반사되어 되살아났던 옛사랑은 착각이었다. 선명한 모습은 색깔 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졌다. 환각에서 깨어난 각성이다. 4연, 다시 현실 속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시인의 발걸음 소리이지만 그녀의 발걸음 같다. 되살아난 옛사랑, 기억된 세계와 현실이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과거와 현재의 발자국 소리도 메아리가 되어 석양빛에 천천히 사그라진다. 5연, 옛사람이 돌아온 것 같은데 다시 사라지니 마음이 아프다. 그녀일까? 혼자 묻고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파랗게 멀어져 별이 된다. 초저녁에 나오는 첫 별일 수 있으나 옛사랑의 상징이다.

되살아난 찰나의 옛사랑, 애통함을 멋스럽게 여러 색의 물감으로 그렸다. 빛과 어둠에 싸여 있다가 장밋빛의 환한 얼굴색이 나타나고 은판 사진처럼 칙칙한 색으로 변했다가, 파란 별로 시가 마무리되었다. 옛사랑은 별이 되어 가슴 한켠 파랗게 늘 빛날 것이다.

이 시는 1905년 '엘 파이스'지에 <기억 El recuerdo>으로 처음 발표했다가 1907년 잡지 '르네상스'에 <꿈속에서 En sueños>란 제목으로 게재되었고, 이후 수정을 거쳐 시집 <고독, 회랑, 다른 시>(1907)에 제목 없이 열다섯 번째로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