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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시

기차를 타고 En tren 안토니오 마차도

by brasero 2020. 11. 30.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마다
나는 늘 삼등 객차
나무 의자에 앉아 가고
홀쭉한 가방 한둘이다.
밤이면 늘 그렇듯
잠을 자지 않기에
낮이면 지나가는
작은 나무를 보느라
기차에서 좀체 잠을 자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
멀리 떠나는 길은 얼마나 즐거운지!
런던, 마드리드, 폰페라다는
가 보고 싶은 멋진 곳
도착하면 고생이다.
나중에 기차 또 걷기도 하고
기차는 우리에게 꿈을 준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노쇠한 말을 거의 잊어먹었어
아, 젊은 수탕나귀는
목적지를 잘 알아!
여기가 어디지?
모두 어디서 내리는지?
내 앞에 자그마한 수녀님
정말 어예쁘다!
고통스럽지만
편안한 그 표정은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준다.
수녀님은
죄인들의 어머니 대신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니
좋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녀님도
어머니이다.
여자들 중에 복된 분이다.
성모 마리아, 작은 어머니이다.
리넨 수녀 모자 밑
천상에서 내려온 얼굴
볼은
노란 장밋빛이다.
장밋빛이었지만 나중에
천주님께 불꽃 같은 귀의로 붉어졌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벌써 빛이 되었다, 유일한 빛...
모든 여자들이 속세를 떠난
수녀원의 동정녀처럼
이 수녀님같이 아름다웠으면!....
내가 사랑하는 소녀는
어쩌지, 이발사 소년과
결혼하고 싶을 거야.
기차는 걷고 또 걷는다
화차는 씩씩거리고
당나귀기침*을 한다.
어서 번쩍 달려가자!

*당나귀기침: 백일해 또는 오래된 감기를 앓을 때 자주 하는 기침을 의미한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와 비슷해서 생긴 낱말이다. 원문의 tos ferina (백일해)는 글자 그대로 '고양이 기침' 이란 뜻이다.

En tren

Yo, para todo viaje
- siempre sobre la madera
de mi vagón de tercera-,
voy ligero de equipaje.
Si es de noche, porque no
acostumbro a dormir yo,
y de día, por mirar
los arbolitos pasar,
yo nunca duermo en el tren,
y, sin embargo, voy bien.
¡Este placer de alejarse!
Londres, Madrid, Ponferrada,
tan lindos... para marcharse.
Lo molesto es la llegada.
Luego, el tren, al caminar,
siempre nos hace soñar;
y casi, casi olvidamos
el jamelgo que montamos.
¡Oh, el pollino
que sabe bien el camino!
¿Dónde estamos?
¿Dónde todos nos bajamos?
¡Frente a mí va una monjita
tan bonita!
Tiene esa expresión serena
que a la pena
da una esperanza infinita.
Y yo pienso: Tú eres buena;
porque diste tus amores
a Jesús; porque no quieres
ser madre de pecadores.
Mas tú eres
maternal,
bendita entre las mujeres,
madrecita virginal.
Algo en tu rostro es divino
bajo tus cofias de lino.
Tus mejillas
esas rosas amarillas -
fueron rosadas, y, luego,
ardió en tus entrañas fuego;
y hoy, esposa de la Cruz,
ya eres luz, y sólo luz...
¡Todas las mujeres bellas
fueran, como tú, doncellas
en un convento a encerrarse!...
¡Y la niña que yo quiero,
ay, preferirá casarse
con un mocito barbero!
El tren camina y camina,
y la máquina resuella,
y tose con tos ferina.
¡Vamos en una centella!

원래 <고독 Soledades>란 제목으로 1909년 9월 잡지 <<라 렉투라>>에 발표했던 시다. '고독'이란 거창한 제목 대신 현대 감각을 살려 '기차에서 En tren'으로 고쳐 시집 <<카스티야의 들판 Campos de castilla>>(1912)에 실었다. 마차도는 프랑스어 교사를 하던 소리아(Soria)에서 마드리드로 갈 때는 열차를 이용했을 것이며 보통 사람들이 타는 삼등 객차의 나무 의자에 앉아 여행을 했을 것이다. 기차에서 잠을 잘 법도 하지만 낮에는 지나가는 풍경을 보느라고 밤이면 기차 안에서 자지 않는 습관 때문에 자지 않는다. 

여행은 하는 것은 기쁘지만 목적지에 도착을 하면 다시 이런저런 교통편을 갈아 타고 다음 목적지로 가든지, 걷기도 해야 한다. 그래도 일상에서 멀어진다는 즐거움이 있다. 앞 자리에 체구가 작은 수녀님이 앉아 계시고 절대자에 귀의한 단정하고 수려한 그녀의 얼굴, 표정과 태도를 숙연하고 다정하게 묘사했다. 모든 걱정과 어려움(a la pena)을 짊어졌지만 고요한(serena) 얼굴빛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자한 허락에 의하여 천당에 가는 행복을 바라는 esperanza(망덕)이나 희망을 준다. 이발사 소년과 결혼하고 싶을 것이라는 사랑하는 소녀는 마차도의 아내가 된 하숙집 주인의 딸 레오노르(Leonor)를 은유하는 것이다. 마차도보다 매우 어린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확답을 듣지 못한 기간에 지은 시로 추정하고 있다. 

마차도의 전기를 참조하고 또한 이 시가 들어 있는 <카스티야의 들판>이란 시집이 나라의 현실을 비판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카스티야 평민의 소박성을 강조하는 '98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이 읽힌다. 하지만 98세대라는 억지스러운 틀을 버리고, 당시 유럽의 문학사조인 상징주의 또는 모더니즘 입장에서 보면 - 그렇다고 이 시가 순수한 상징주의 시라는 말은 아니다 - 시는 아래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 

기차는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고 종착지는 죽음이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늘 간소한 차림으로 기차 여행을 하는 것이다. 기차로 방문하고 싶은 도시는 모더니즘의 소재이다. 앞 좌석의 수녀님과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성모경 아베 마리아를 듣는 것 같다. 사랑하는 소녀는 마차도와 결혼하게 된 레오노르가 맞지만 그녀가 이발사와 결혼하고 싶다는 전기적 사실은 없다. 이발사는 사실 페르난 카바예로(Fernán Caballero)가 1849년에 발표한 소설 <갈매기 La gaviota>의 여주인공 마리살라다(Marisalada)가 결혼한 인물이다. 기차를 불꽃(centella)처럼 번쩍 달려가고 싶은 것은 19세기 리얼리즘 시인 라몬 데 캄포아모르 (Ramón de Campoamor, 1817~1901)의 시 <급행 열차 El tren expreso>를 패러디한 것이다. 캄포아모르는 달리는 기차를 "갈기를 번쩍거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자(un león con melena de centellas)"에 비유했다. 그러면 기차는 기적을 내며 달리는 실세계 기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기차에 오른 마차도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