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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소설

스페인에 있었지만 한국에 없었던 물건 -돈키호테와 17세기 초의 축융기 batán

by brasero 2020. 8. 5.

축융기 batán은 지금 스페인에서 사라진 도구이지만 옛날에 양모 또는 천의 조직을 단단하게 하는 장치였다. 주로 물가에 있는 시설로써 수력으로 나무 망치(mazo)를 움직여 양모의 기름때를 빼고 조직을 조밀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아래 그림처럼 물이 수차(noria)를 돌리면 수차에 연결된 망치가 양모를 큰소리를 내며 때리는 것이다. 

이 축융기가 1605년에 발간된 돈키호테 1권에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20장은 밤에 축융기의 망치가 때리는 굉음의 정체를 몰라 두려움에 떨던 산초와 무섭지만 소리의 원인을 캐내고자 나서려는 용감한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고자 길을 나서려던 돈키호테를 산초는 등을 오싹거리며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돈키호테가 가지 못하게 그의  말 로시난테를 산초의 나귀 발에 묶어 버렸다. 그리고 산초는 염소치기 목동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배로 강을 건너는 염소의 수를 반복해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돈키호테에 붙어 있던 산초는 급기야 급한 용무도 그런 자세로 배출했다. 쿠린내를 맡은 돈키호테는 산초가 겁에 질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럭저럭 날이 밝자 산초는 로시난테의 발을 풀었고 돈키호테와 산초는 쿵쿵거리는 괴성을 찾아 길을 나섰다. 숲 사이에 폭포가 있고 그 아래에 폐허가 된 집들이 있고 그 집들 어디에서 소리가 났다. 집에 들어가 확인하니 축융기의 망치가 때리는 소리였다. 원본의 장면은 아래와 같다.

.... para ellos espantable ruido que tan suspensos y medrosos toda la noche los había tenido. Y eran (si no lo has, ¡oh lector!, por pesadumbre y enojo) seis mazos de batán, que con sus alternativos golpes aquel estruendo formaban. ...밤새 몹시 긴장하고 두려워했던 소리 ..... 그것은 (독자들이여 실망하거나 성을 내지 말기를!) 굉음을 내며 번갈아 내리치는 여섯 개의 축융기 망치였다

소리가 불의한 어떤 원인으로 생각하고 바로 잡겠다던 돈키호테는 무안해졌고 이런 그를 산초는 웃어대며 놀렸다. 화가 난 돈키호테는 창으로 산초를 때렸고 예를 갖추라고 나무랐다.

이런 mazos de batán을 '축융기의 망치'로 옮기면 있는 그대로 번역한 것이 된다. 물론 batán은 오늘날의 보통 스페인 원어민에게 낯선 물건인 만큼 '축융기'도 한국의 독자에겐 생소하다. 돈키호테 스페인어판을 읽는 스페인 독자가 친숙하지 않는 도구 batán을 이해하려는 정보 처리의 어려움은 한국어 번역본에 '축융기'라는 정보를 처리하는 한국인 독자가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batán에 해당하는 한국어 '축융기'가 있어 독자반응의 대등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번역이 가능하다. 물리에서 단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값을 유지한다는 질량 보존 법칙처럼 텍스트가 스페인어에서 한국어로 변해도 '인지 처리 난이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축융기를 한국의 독자에게 낯설고 어렵다는 이유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친숙하고 유사한 다른 물건으로 대치하는, 원본을 해치려는 의도는 아닌, 선의의 '해설'을 하는 번역을 할 때가 있다. 가령 축융기의 망치가 아니라 '빨랫방망이'라고 번역했다고 하자. 인지 처리의 부담이 낮아진 것은 맞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다. 깜깜한 밤에 빨랫방망이 혼자 빨래를 때리며 소리를 내는 것이 되어 버린다. 빨래하는 마을의 아낙네도 없이 빨랫방망이가 알아서 두들기는 자동세탁기가 1605년 스페인에 있었다는 말이다. 한쪽 문이 열렸지만 다른 쪽 문이 닫힌 것이다.

번역은 해설이 아니고 설명도 아니라 오직 번역이어야 한다. 번역은 원본의 언어를 더하거나 덜거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물론 늘 이런 번역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자가 아무런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원본에 있는 뜻을 번역본 독자의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번역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번역은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작품이어야 한다.

아래는 스페인 아라곤주의 테루엘도에 과달로페(Guadalope)강이 흐르는 카스테요테(Castellote)에 옛 축융기를 복원한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