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스페인 소설

후안 마르세의 몰역사 모더니즘 - 일본은 이차대전의 희생자

by brasero 2019. 10. 19.

후안 마르세와 소설<도마뱀 꼬리>

예술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상상의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야 어떻든 일탈, 방종, 부도덕, 악행,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하지 못할 것도 허용되는 게 픽션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이런 자유를 탐닉한다. 갇히지 말라. 가두지 말라.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라는 국적과 언어, 가톨릭 종교라는 그물을 뚫고 비상하기 위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지었고, 보들레르는 악의 꽃은 미의 향연을 펼치고 진리를 구하고자 '세상 밖으로' 갔고, 카프카는 세상의 부조리한 심연을 고발하며 인습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세계를 너머 저편으로 가는 시도는 예술의 진리이다. 아름다우면 그게 바로 진리인 게 모더니즘의 근간이다. 물론 모든 예술의 진리이기도 하지만. 

2000년에 발표한 후안 마르세(Juan Marsé, 1933~2020)의 소설 <도마뱀 꼬리 Rabos de lagartija>는 저 너머 진리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소설은 스페인 내전 후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리얼리티는 도마뱀 같다. 꼬리를 자르고, 현란한 꼬리를 두고 몸통은 저만치 가고 없는 것 같다. 마르세의 기억과 상상을 가미한 소설은 단지 꼬리일 뿐이고 진리인 몸통은 없다. 꼬리만 보고 진실의 실체를 본 착각이 이 소설에 있다.

주인공 다비드, 15살 소년은 도마뱀 꼬리*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실과 진실, 현실과 환영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환청과 이명에 시달리고, 환영과 유령과 대화를 하고, 영화, 만화, 펄프 소설을 현실에 섞는 감수성이 강하고 마음이 여린 소년이다. 또한 직관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베르그송의 완전 경험과 같은 능력을 가진 아이이다. 다비드의 아버지는 프랑코에 맞선 공화군 마키스였고 경찰의 체포를 피해 피신했다.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와 치스파라는 늙은 검정개와 함께 다비드는 스페인 내전 후 이차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에 바르셀로나 산동네에 산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검거하려는 경위 갈반의 방문을 받는다. 갈반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진짜 커피(스페인 내전 후 커피는 귀하고 비싸 치고리차를 대신 마셨다)도 가지고 오고, 장미도 선물한다.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범죄는 사면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준다. 하지만 다비드는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는 갈반이 싫고,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다비드가 애지중지하는 검둥이 치스파를 없애는 데 도움을 준 갈반을 증오한다. 치스파를 처치한 갈반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프랑코의 앞잡이 갈반이 악의 근원임을 증명하여 어머니로부터 갈반을 영원히 격리시키고 싶다. 갈반이 집에서 잃어버린 라이터로 갈반이 치스파를  죽였다는 흉계를 꾸민다. 진리를 보여주기 위하여 거짓을 꾸민 것이다. 간계가 작동하여 갈반이 한동안 집 방문을 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 비대임신증으로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죽는다. 평소처럼 갈반이 곁에 있었으면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비드는 거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이후 이모집에 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스무 살이 다 된 다비드는 사진관에서 일한다. 바르셀로나에 파업이 발생했다. 보도용으로 시위 현장을 그대로 전하는 사진을 찍으려다, 경찰에 발각되어 도망을 치다 전차 사고로 죽는다. 파업 장면을 더 잘 전할 수정된 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진실한 사진을 원했다. 교정한 사진이 진리를 더 분명하게 드러낼 것인데도 말이다. 비극이다. 거짓으로 진리를 알리려다 어머니가 죽었고, 진실로 진리를 알리려다 다비드가 죽었다. 진리의 이중 처벌이다.

마르세가 그리는 세계는 뻔하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마르세의 상상이 가미된 세계 즉 허구이다. 진리는 현실의 충실한 기록에 존재하지 않고 상상으로 만들어진 소설에 있다. 스페인 내전을 촉발한 좌우의 갈등과 역사적 진리를 예술로 해결하려고 했다. 진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푸른 장미'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처럼  다비드의  어머니, 빨간 머리가 키운 '데이지 꽃' 이고 소설 <도마뱀 꼬리>는 실제 역사나 총제적 현실보다 더 진리가 되어 영생을 얻은 것이다.

스페인 내전 기억과 프랑코 독재 경험이 있는 마르세는 <도마뱀 꼬리>에서 프랑코와 반프랑코주의에 역사 평가를 내린다. 다비드는 내전 중 폭격으로 죽은 형 후안의 유령, 프랑코에 대항한 이비인후과 의사의 유령, 반프랑코주의였던 아버지의 환영과 대화하며 프랑코는 악이었다는 역사를 배운다. 또한 어머니를 사모하는 경찰 갈반이 고문과 폭력을 행사하고, 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이 있어, 프랑코의 전체주의는 절대악임을 깨닫는다. 그런 다비드에게 프랑코의 반대편에 있는 좌파와 무정부주의자는 선이자 영웅이다. 하지만 그들도 프랑코 진영만큼 악이다. 영웅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동지의 자금을 횡령했고, 신부를 죽인 혐의가 있고, 간통을 일삼는 집안을 내다 버린 주정뱅이이다. 정치 경찰 갈반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머니를 도우려는 자상한 남자이다. 무승부이다. 스페인 내전은 승자가 없이 두 진영이 다같이 패한 전쟁이었다. 너에게도 잘못이 있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양비론이다. 이는 어쩌면 은폐된 진리를 보여 주는 묘한 승부수일 수 있다. 우는 악, 좌는 선 또는 우는 선, 좌는 악이라는 이분법의 신화를 깨뜨리고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외양과 실제는 다르고 진리는 알 수 없듯 양비론이 늘 현실을 바르게 이끄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양비론을 마르세는 <도마뱀 꼬리> 이전부터 추구하였다. 그의 출세작인 <테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 Últimas tardes con Teresa>(1966)는 부르주아 좌파 대학생의 낭만적인 허위와 프랑코에 대항하던 리얼리즘 문학을 비판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모사 리얼리즘을 극복하고 정치 선전물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넘어 선 것으로 소설은 찬사를 받았다. 물론 프랑코 독재에 항거하던 리얼리즘 작가들은 이런 마르세를 회색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루이스 고이티솔로가 <테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를 비빌리오테크 브레브상 수상작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고이티솔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상을 받았다. 프랑코를 공격하는 마르세를 우파는 반동으로 여겼지만 좌파에 칼을 겨눈 우군이라고 환영한다. 하지만 마르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나키스타이다. 가령, 카탈루냐 독립에 반대를 천명해서 스페인의 애국심으로 언론에 이용되지만 그렇다고 에스파뇰주의자는 아니다.

1966년 출세작 <테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의 리얼리즘적인 양비론 시초와는 달리 이후 1993년에 발표한 <상하이의 매력 El embrujo de Shanghai>에서는 스페인 국내 역사 내전에 대해서는 좌우의 공동 책임이라는 시각을 고수하지만 국제 역사에는 몰역사의 모더니즘 시각을 견지한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과 독재의 폐단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이 나을 법도 하건만 반프랑코주의자가 상하이에 체류할 수밖에 없는 환상이 등장한다. 소설에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 중국 여성이 창녀촌에 감금되어 일본군에게 쾌락을 제공한다는 구절이 있다. 위안부 여성을 아무 감정 없이 기계적 중립을 지킨 묘사라고 할지라도 이런 객관성은 피해자의 아픔을 은폐하고 가해자의 입장과 범죄를 정당화하는 역사 인식이다. 비뚤어진 역사관에 모더니즘이란 비단보자기를 씌운 것이다.

스페인 역사에 적용한 양비론을 스페인 밖으로 확대한 것은 좋으나 역사 수정주의의 우를 범했다. 반지성의 표본이다. 동아시아 역사에 수정주의 시각은 <도마뱀 꼬리>에서 분명해진다.  나치는 악이라는 평가를 수정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것처럼 나치 독일은 어떤 예술로도 용서될 수 없다. 나치는 악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독일은 영국 전투기 조종사를 죽인 나쁜 놈이다. 하지만 엄연한 가해자 일본을 원자폭탄의 희생자로 둔갑시킨다. 일본 우파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스페인의 최고 문학상인 세르반테스상을 받은 마르세가 말이다. <도마뱀 꼬리>에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은 다비드 어머니와 치스파의 병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인류의 해악으로 묘사된다. 원자폭탄은 인류의 적이다. 이를 사용한 미국은 일본인의 인권을 짓밟은 사악한 국가이다. 그런가. 그러면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은 어디 있는가. 역사 수정주의자 마르세에겐 없다. 그러기에 소설에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은 칼에 찔리고 야자나무에서 떨어지는 희생자이다. 때린 놈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얻어터지고 죽임을 당한 피해자라고 억지를 쓰는 일본인처럼 마르세는 이를 두손 들어 동조한다. 이런 마르세의 몰역사 시각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스페인의 일부 초등학교 교사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전쟁의 피해를 교육하는 역사 시간에 나치와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인류의 악이라고 비판하며 나치의 잔악함을 가르치지만 전범 일본의 폭력과 식민지 경영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주의 교사와 다를 바 없다. 이런 하수의 역사 인식으로 스페인의 독자 - 다비드에게 공감이 갈 망가를 사랑하는 청소년과 사무라이와 카미카제를 존경하며, 김치를 기무치로, 된장을 미소로, 김밥을 수시로, 위안부는 창녀였다는  생각을 하며 무라카미 하루끼를 탐닉하는 한복과 기모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스페인 성인에게 - 그것도 임나일본부가 사실인 것처럼 퀴즈로 출제되는** 스페인에서 왜곡된 동아시아 역사를 전하고 있다.

마르세는 독학으로 글쓰기를 해 성공한 작가이다. 반프랑코주의자 양 아버지의 구속으로 일찍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귀금속사의 도제가 되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 대학이 참된 정신을 심어 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학이 아니면, 적어도 사고에 매진해 인류의 보편 가치와 선악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마르세는 스페인의 좌파나 우파나 모두 심중에 있는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 미서전쟁에 패한 역사 경험으로 미국을 적으로 인식하는 막연한 민족주의, 아니면 제국주의 스페인의 수탈에 일말의 반성도 없이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부흥을 외쳤던 '98세대'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 스페인의 영광을 그리며 제국 일본에 연민을 느끼는 걸까. 위안부를 운영한 적이 없고 강제동원은 없었고 한국에 근대화의 시혜를 내린 자상하고 예의 바른 일본은 중남미와 필리핀의 자원을 수탈하지 않았고 선진 문화로 근대화를 이끈 문명의 스페인을 보는 듯 할 것이다.

<도마뱀 꼬리>에서는 스페인에서 유럽으로 더 나아가 세계로 비상하려는 마르세의 모더니즘적 시도가 있다. 하지만 반지성과 몰역사로 추악하다. 반인류 범죄를 저지른 제국주의 일본을 옹호하는 마르세는 놀랍다, 놀랍다 못해 충격이다. <도마뱀 꼬리>로 마르세는 2000년에 스페인 비평가상과 소설가상을 수상했다. 또한 엘문도와 엘파이스 신문이 선정한 우수 스페인 소설 25의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악이라는 판단에 아무런 의의를 제기하지 않고 유독 제국주의 일본을 선으로 포장해 선악의 기준을 흔드는 야비하고 음흉한 모더니즘을 펼친 <도마뱀 꼬리>에 상을 내린 스페인 문학계의 고매하고 열린 안목에  똥물 한 바가지 경의를 표한다. 오늘도 스페인의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마르세가 언급되고 대학 입학시험에도 출제되고 있다. 이렇게 소설 <도마뱀 꼬리>는 인류 기억의 한 장면으로 '나치는 악 일본은 선'으로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도마뱀 꼬리는 소설에서 주인공 다비드의 친구 파울리노의 '치질' 치료약이다. 사실 동성애자인 외삼촌에게 성폭력을 당한 파울리노의 아픈 항문를 치유하기 위한 약으로 다비드와 파울리노가 구했던 것이다. 도마뱀 중에 동물계에 존재하지 않는 모더니즘의 말재간으로 마르세가 조어한 '말뱀(palabratija, palabra 말 + lagartija 도마 = 말뱀)'은 효험이 최고이다. 말뱀은 문서를 먹고사는 노란색과 녹색이 알록달록한 도마뱀으로 다비드와 파울리노가 다니는 구엘공립학교의 교실에도 출몰하는 파충류이다. 

**안테나 트레스(Antena 3)의 '아오라 카이고(Ahora caigo)'란 퀴즈 프로그램에서 중세 이전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던 나라는 일본이라는 질문이 제출되었다.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백제 또는 가야를 지배했다는 날조된 임나일본부가 정설인 것처럼 스페인 국민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에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