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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소설

후안 마르세의 소설 번역 - 발진티푸스 piojo verde '녹황색 머릿니'

by brasero 2023. 9. 9.

후안 마르세(Juan Marsé, 1933~2020)의 소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 Últimas tardes con Teresa≫(1966)은 1950년대 후반 바르셀로나 하층 무산계급, 도둑이자 들치기인 마놀로(Manolo)와 부유한 좌파 대학생 떼레사(Teresa)와 그녀의 집에 일하는 하녀 마루하(Maruja)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아울러 소설은 스페인내전 승리 후 권력을 잡은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한 대학생들의 시위와 노동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사회 평등은 낭만적인 투쟁만으로 쟁취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잣집 딸과 사귀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삐호아빠르떼(Pijoaparte)*(주 1 더보기)란 별명의 주인공 마놀로는 바르셀로나 북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 몬떼 까르멜로(Monte Carmelo) 동네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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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Pijoaprte는 마르세가 pijo(부유한 계층을 낮잡는 말, 남성 성기 비속어)에 '떨어진' '특별한' 뜻의 aparte를  합성한  조어이다. 보통 부자가 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una persona que no es pija y quiere escalar y llegar a serlo como sea) 남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마르세는 패트리샤 하트(Patricia Hart)와의 인터뷰에서 Pijoaprte는 까르멜로 산동네에서 있던 별명으로, pijo는 남성의 성기(miembro viril)를 뜻하는 동시에 돈을 가지고 싶은 열망이 있고 여자와 데이트를 하지 않는 동네에서 에로틱한 활동이 별로 없는 남자를 조롱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아래 인용문 참조).

패트리샤 하트의 책 ≪The spanish sleuth 스페인 형사≫1987. 187쪽

1960년대 까르멜로산의 chabola 판잣집 (사진 엘빠이스 신문)

소설 1부 2장은 까르멜로 산동네를 묘사하고 있다. 약 200미터 높이에 이르는 나무가 별로 없는 나지막한 언덕 같은 산에는 아이들이 날리는 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어서 시대 배경을 언급한다.

En los grises años de la postguerra, cuando el estómago vacío y el piojo verde exigían cada día algún sueño que hiciera más soportable la realidad, el Monte Carmelo fue predilecto y fabuloso campo de aventuras de los desarrapados niños de los barrios de Casa Baró, del Guinardó y de La Salud.

전쟁이 끝난 시절, 허기진 배와 발진티푸스로 절망적이고 어두운 그때는 현실을 더 견딜 수 있는 꿈이 매일 필요했고, 까르멜로 언덕은 까사 바로와 엘 기나르도와 라 살루드 동네의 누더기옷을 걸친 아이들이 모험을 즐기러 드나들던 최상의 장소였다. 

el piojo verde는 직역하면 사람 몸에 기생하는 '푸른색 이'이지만, 사실 '이'가 옮기는 전염병 '발진티푸스'이다. 창작과 비평사는 '녹황색의 머릿니'로 오역했다** (주 2 더보기).

전후 암울하던 시절에 굶주린 배와 녹황색의 머릿니는 현실을 견딜 꿈을 날마다 요구했고, 몬떼까르멜로는 까사바로, 기나르도, 라살루드 동네에 사는 누더기 차림의 아이들이 좋아한 모험의 장소였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창작과 비평사. 2016.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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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2. 이 소설을 여대생과 좀도둑이란 제목으로 최초로 번역한 장원출판사는, 복잡하거나 애매하거나 불분명하면 누락시키는 전략으로 el piojo verde를 번역하지 않고 생략했다. 또한 장원출판사는 '빈 위장' 즉 '배고픈 배' estómago vacío를 '텅 빈 가슴'으로 오해했다.

전쟁이 끝난 암울했던 시절에는 텅 빈 가슴의 이들이, 현실을 지탱하게 해 줄 어떤 꿈을 요구할 때 까르멜로 산은 까사 바로, 기나르도, 라 살루드 마을의 누더기를 걸친 소년들이 가장 자주 찾는 꿈같은 모험의 장소였다. (장원출판사. 1993. 34쪽)

창비사는 원문의 '녹색 verde'을 '녹황색'으로 옮기며 piojo는 '머릿니'로 번역했다. 오역인 줄 모르는 번역본의 독자들은 전후 곤궁한 시절에 옷에 이나 머리털에 이가 들끓던 것을 상상하며, '녹황색 머릿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기생 곤충인 '이'가 정말 '녹황색', 아니 원문처럼 '푸른색'일까 하는 의문이 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아니면 '푸른 이'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푸른 장미(green rose)'처럼 은유나 상징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동물의 피부나 머리에 빌붙어 피를 빠는 '이'는 푸른색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나 머리카락 색과 유사하다. 아래  인용구의 설명처럼 이는 투명한 흰색, 갈색, 회색, 잘 익은 색이고 방금 피를 빤 이는 붉은색을 띤다. 

licefreee.com 이박멸 사이트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푸른색의 이'가 왜 '발진티푸스'라는 병을 일컫는 말이 되었을까.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나 1940년대에는 이가 매개체인 발진티푸스(tifus exantemático)***(주 3 더보기) '푸른 눈동자들 Ojos verdes'라는 이름의 대중가요처럼 널리 퍼졌다는 데서 생겨났다. piojo의 마지막 세 가지 음은 ojo와 같은 소리가 나서 운이 맞고, 이(piojo)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는 유행하던 노래 ojos verdes처럼 빠르게 번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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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3. 발진티푸스는고열과 발진이 주증세인 열성-급성의 법정전염병.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건규칙에 의한 국제 감시 전염병의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이 병의 유행은 전쟁과 관계가 깊어 전쟁티푸스 또는 기근열-교도소열 등의 별명이 있다. 그것은 이 병의 매개곤충인 ‘옷이’가 의류나 몸이 더러울 때 발생하기 쉬우므로 군대나 교도소, 전쟁터 등 환경이 나쁜 곳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환자의 수는 2,500만 명이나 되었고, 영국과 기타 유럽에서도 전쟁-기근 때문에 이 병이 대유행했던 기록이 있으며,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유행 했었다.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유럽-아시아의 일부지역에만 존재할 뿐이다. 병원체는 리케차 프로바제키(Rickettsia prowazeki)로 옷이에 기생증식하여 옷이의 분변과 함께 배설되면서 옷이가 흡혈하기 위해 피부에 준 상처나 사람이 손으로 긁어 생긴 상처를 통하여 감염된다. 잠복기간은 10~14일이며 급작스런 오한이나 함께 발열하여 3일 정도 경과되면 40℃ 전후의 고열이 나게 되고, 두통-관절통-결막충혈 등과 지름 2mm 안팎의 붉고 작은 출혈성 발진이 온몸에 많이 생긴다. 증세는 장티푸스와 비슷하고, 바일-펠릭스반응(Weil-Felix test)이라 하는 혈청반응에 의해 감별된다. 클로람페니콜이나 테트라사이클린계의 항생물질이 특효를 보여 치사율도 낮아졌다(20%). 예방으로는 살충제로 옷이를 구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발진티푸스백신 접종도 유효하다. (지제근 저. 알기 쉬운 의학용어풀이집)

노래는 1937년 마드리드에서 최초로 발표되어 인기를 얻었고 이후 수많은 가수들의 입에 올랐다. 1940년대 독재자 프랑코는 노래가 스페인 제이공화국 때 나와 인기를 얻었고 가사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가사 중에 '창녀촌 문틈에 기대어 apoyá en el quicio de la mancebía'는 '어느 날 당신 집의 문틈에 기대어 apoyá en el quicio de tu casa un día'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노래는 유튜브에 있어 들어보면 되는데, 비트 있는 록이나 힙합이나 랩이나 발라드 등 다양한 조화와 재미가 있는 요즈음 노래에 비하면 도대체 1940년대 스페인 사람들은 왜 이런 노래를 좋아했던 것일까 하며, 의아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할 수 없듯, 그대로 이해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1940년대 머릿니나 옷니가 옮기는 발진티푸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북부 라 리오하의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마을에서는 1943년 el piojo verde로 인해서 마을 축제가 취소되었다는 기사의 제목과 일부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산또 도밍고에 1943년 축제가 piojo verde로 연기되었을 때 (larioja.com 기사)
질병은 이가 전달했고, 발병되었을 때 흔히 '푸른색 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 '푸른 눈동자들' 때문이다.

 

떼레사와 함께한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