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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페인 소설

형용사 discreto와 에두아르도 멘도사의 소설 <경이로운 도시>의 은밀한 하숙집

by brasero 2020. 12. 6.

2016년 스페인어 문화권 최고 문학상인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한 에두아르도 멘도사(Eduardo Mendoza, 1943~)의 소설 <경이로운 도시 La ciudad de los prodigios*> (1986)의 번역 일부를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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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iudad de los prodigios를 글자 그대로 옮기면 '천재들의 도시'인데 민음사의 번역본은 '경이로운 도시'라고 훌륭하게 옮겼다. 

"19세기 말, 골목길 위쪽 평지에 하숙집이 하나 있었다. 그 하숙집은 집주인들의 의도에 따라 아주 은밀하게 만들어졌다. 응접실은 비좁았다. 그 방에는 소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위에는 철로 만든 서류함이 놓여 있었다. 하숙인 명부는 항상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 촛불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그래서 원한다면 누구나 하숙집의 적법성을 언제든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경이로운 도시 1, 1장 20쪽, 민음사 2017)

하숙집은 시골뜨기 주인공 오노프레 부빌라가 바로셀로나로 와서 처음 잡은 숙소이다. 그런데 하숙집은 매우 비밀스럽게 지어졌다고 했다. 그것도 주인이 의도한 바라고 했다. 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눈을 반짝이며 읽는다. 좁은 응접실, 소나무 책상, 철제 서류함, 하숙인 명부가 있고, 촛불이 깜박이고 하숙집의 적법성이란 대목에서 어둡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은밀하게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도 하숙집이 내밀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못을 박는 확실한 증거는 부족한 것 같다. 에드아르도 멘도사가 일부러 모호하고 신비한 티저로 독자가 고패질을 하도록 선동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 원본을 찾아본다.

A finales del siglo pasado había una pensión en el rellano superior del callejón. Era un establecimiento de condición muy discreta, aunque no exento de pretensiones por parte de sus dueños. El vestíbulo era pequeño: sólo cabían allí un mostrador de madera clara con su escribanía de latón y su libro-registro, siempre abierto para que quien lo deseara pudiera comprobar la legalidad del negocio recorriendo con los ojos, a la luz mortecina de un velón….*

*민음사 번역본이 기준으로 한 원본이 위와 다르면 지금 논의는 허위이고, 블로그 필자의 야비다리를 채찍과 도끼로 질책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위는 아래와 같이 옮겨진다.

19세기 말, 골목길 위 평지에는 하숙집이 하나 있었다. 이 하숙집은 아주 초라했지만 하숙집 주인들의 허영심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협소한 현관 홀에는 밝은 색의 목재 카운터가 있고 그 위엔 황동 필기구 세트와 하숙인 명부가 있었다. 명부는 늘 펼쳐져 있어 옆에 까물거리는 촛불에 비추어 누구든지 하숙집이 적법하게 영업을 하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숙집 (un establecimiento)이 de condición muy discreta한 것을 매우 은밀하게 지은 것이라고 번역했다. 형용사 disecrto, ta는 다의어로 비밀스럽다, 진중하다, 적당하다의 뜻이자 반어적으로 보잘것없다, 초라하다, 옹색하다, 알량하다, 변변찮다는 의미가 있다. 아래 한림원 스페인어사전(RAE)의 4번 항은 discreto, ta가 moderado, sin exceso (도가 넘지않게, 평범한)의 뜻이지만 주로 sent. peyorativo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고 했다. 

"의도(intención)"로 번역한 pretensiones은 야망, 허영, 허화, 우쭐거림이다. 그러면 aunque no exento de pretensiones por parte de sus dueños는 주인들의 허영심을 면제받지 (no exento) 못 했다는 것인데, 뽐내고 싶어서 볼품없는 하숙집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좁은 현관 홀 (vestíbulo era pequeño)에 밝은 색의 목재 카운터 (un mostrador de madera clara)가 있고 그 위에는 거창하게 '황동으로 만든 필기구 세트 (escribanía de latón)'를 갖춰 놓은 것이다.

"책상"으로 옮긴 mostrador는 barra와 동의어이고, 한림원 스페인어사전은 '진열탁자' 또는 '카운터'라고 풀이했다. 3번 항은 "바, 카페 , 기타 영업장에서 손님들이 원하는 것을 올려 놓는 바깥쪽은 막혀 있는 탁자와 같은 것"이라고 해서 '커운터'를 설명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커운터'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철로 만든 서류함"으로 옮긴 escribanía는 한림원 스페인어사전(RAE)에 따르면 '책상'이기도 하고 아래 5번 항처럼 "잉크통, 잉크건조기(salvadera)와 다른 물품으로 구성된 다리가 있거나 작은 쟁반에 놓여진 필기 도구(recado de escribir)"라고 했다.

형용사 discreto, ta를 비밀스러운 뜻으로 인지하면 뒤 따르는 현관 홀의 묘사나 설명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한다. 하숙집의 적법성 여부와 가물거리는 촛불이 하숙집이 은밀하게 지어졌다는 의미 틀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지만 완전하지 않고 오히려 혼란을 야기시킨다.  하지만 discreto, ta를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다란 뜻으로 파악하면 집 주인의 허영심과 청동 필기구와의 인과 관계를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시껍절한 하숙집에 비단 보자기를 씌운 간단한 우스개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