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리스본의 겨울 El invierno en Lisboa≫(1987)은 스페인 그라나다대학교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Antonio Muñoz Molina, 1956~)의 두 번째 작품으로 1988년 스페인 비평가상과 스페인 국가소설상 수상했다. 산티아고 비랄보(Biralbo)라는 재즈 피아니스트와 미술품 밀수꾼의 아내 루크레시아(Lucrecia)가 스페인의 북부 바스크주의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 시와 마드리드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배경으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얽힌 이야기이다.
소설 4장은 소설의 서술자, 이름이 없는, 마드리드에 사는 '나'의 일요일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아침 늦게 일어나 바에서, 정오쯤 커피를 시키기는 창피해서, 맥주를 마시며 아침을 먹으며 신문을 읽는다. 오후 2시 30분이면 신문을 조심스럽게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깨끗하고 오래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아래는 식당에 대한 묘사이다.
.... el resturante, una casa de comidas aseada y antigua, con mostrador de zinc y frascos cúbicos de vino, donde los camareros ya me conocian, pero no hasta el punto de atribuirse una molesta confianza que me había hecho huir otras veces de lugares semejantes.
깨끗하고 오래된 식당은 아연색의 카운터가 있고 포도주는 사각 유리병에 담겨 나오고 종업원들과 나는 벌써 아는 사이이지만 옛날에 나를 친하게 대해서 언짢아 도망을 쳤던 그런 식당의 종업원 정도는 아니었다.
una molesta confianza는 친해서 부담이 되는 또는 너무 친밀해서 귀찮거나 짜증이 나거나 마뜩잖은 기분이다. 멀리하면 서운할 수 있으니 친하게 지내다 보면 가식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바람에 부담이 되어 못마땅스럽거나 구살머리쩍은* 느낌인데,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 일어날 법하고 어떤 인간관계에도 발생할 수 있는 정감이다. 그래서 친하지만, 친하게 대하는 바로 그 행동이나 감정이 언짢을 때가 있고, 그러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친했던 사람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친했던 그 사람은 내게 배신감이 들거나 실망을 할 것 같다. 아니, 되려 떠난 나를 기뻐할지도 모른다. 내가 못마땅하게 여겼던 친밀한 행동은 내가 떠나도록 한 계획일 수 있으니까.
- 구살머리쩍다: 마음에 마땅치 않고 귀찮다.
민음사는 아래와 같이 옮겼다.
깔끔한 전통 음식을 파는 그 식당은 아연으로 만든 진열장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로 장식되었다. 웨이터들과는 이미 알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비슷한 다른 식당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민음사. 2017. 1판 9쇄. 40~41쪽)
una molesta confianza가 있는 구문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pero 그러나, no hasta el punto de astribuirse 생각할 만큼은 아니다, una molesta confianza 친해서 귀찮음, que 관계대명사, me había hecho huir 내가 도망을 가도록 했던, otras veces 다른 때에(옛날에), de lugares semejantes(유사한 장소들로부터, 유사한 식당들부터)이다. 즉 지금 가는 식당의 종업원들은, 과거에 종업원들이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허물없이 행동하는 바람에, 그 친밀함이 언짢아서 도망을 갔던 그런 식당처럼, 귀찮을 정도로 친밀하게 굴지는 않다는 뜻이다. 민음사는 'confianza'를 '믿음직스럽다'라고 번역했다. 즉 웨이터들은 내가 다른 식당으로 가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불닭면이 맵기는 매운데, 못 먹을 정도로 맵싸하지 않다는 것처럼 종업원들이 믿음직스러웠지만, 다른 식당으로 가지 못할 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원본의 '가까워서 불편한', '친밀해서 짜증이 나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번역이다.
이 소설을 최초로 옮긴 웅진출판사의 ≪리스본의 겨울≫(1995)는 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
내가 가는 식당은 깨끗하고도 오래 된 음식점인데, 하얀 금속 진열장과 네모난 포도주병이 특색이고, 웨이터들은 이제 내 얼굴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내가 거북해서 도망쳐 나올 정도로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웅진출판사. 1995. 37쪽)
적어도 una molesta confianza를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와 '거북하다'로 표현해서 민음사의 번역과 다르게 원본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 옮겼다.
이 소설에는 una molesta confianza 친하다 보니 오히려 생기는 짜증(언짢음, 못다땅함, 불편함, 귀찮음, 구상머리쩍음, 마뜩잖음) 이외에도 모순어법이 제법 있다. 가령, 1장에 주인공 비랄보는 루크레시아와의 불행했던 사랑을 돌이키며, 소설의 서술자인 '나'에게 'Me he librado del chantaje de la felicidad(난 사랑의 협박으로부터 벗어났어)'라고 말했다. chantaje는 공갈, 갈취, 협박, 위협으로 행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으로 일종의 모순어법이다. 행복해서 즐겁거나 기쁘거나, 웃음이 나거나 축복스럽기보다 우리를 속이는 협박이나 공갈 같은 범죄 chantaje처럼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는 법이다. 비랄보는 루크레시아를 사랑해서 행복했다면, 그 행복은 그의 멱살을 잡고 마음과 육체를 갈취하는 것 같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mostrador는 '진열장'이 아니라, 아래 RAE의 2번과 3번처럼, 바 또는 식당에서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놓는 탁자나 판으로 우리말로 '키운터'이다.
frascos cúbicos de vino는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가 아니라 웅진출판사의 번역처럼 '네모난 포도주병', 즉 사각 유리병에 담긴 포도주이다. 스페인에서는 지금도 옛날처럼 사각 유리병에 포도주를 담아 내놓는 식당이 있다. 아래는 스페인 국영텔레비전(TVE)의 연속극 <Amar en tiempos revueltos 혼란한 시기에 사랑>에서 뻴라요가 경영하는 식당의 카운터(mostrador, 다른 말로 barra고 한다) 위에 사각 유리병에 담긴 포도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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