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패망한 역사를 망각하고 자국민을 흘겨보며 일본의 눈치를 살피는 권력자에 아부하는 들때밑(세력 있는 집의 오만한 하인) 보다 더 고약한 기자, 언론인, 검사, 판사, 변호사, 지식인, 교육자, 관료, 공무원, 정치인, 학자, 문필가, 국민들은 정녕 야비한 뇟보(천하고 더러운 사람)일 것인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도 괜찮다며 매국을 하고 잇속을 채우는 변절이 세상을 헤쳐가는 체세술이 되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아도취자들이 넘쳐나는 나라가 한국이 아닌가.
이 훌륭한 나라의 지도자는 광복절 축사를 호기만발 아주 멋들어지게 해 신통방통한 마당에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스페인이 뭐라 하든 그게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겠냐 마는 스페인 소설가의 생각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러기 전에 보통 스페인 사람들에게 일본이란 무엇일까. 일본은 멋있는 선망의 개념이다. 텔레비전 퀴즈쇼에 출연한 사람들은 상금을 타면 꿈에 그리던 일본 여행을 갈 것이라고 하고, 일본을 사랑하는 '세련되고 지적인 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드라마에서 일본 소재나 주제는 이국적이며 이지적인 것으로 늘 화면을 채운다. 물론 최근 우리 문화의 약진으로 케이팝과 한국영화와 드라마, 나아가 한국어와 한국 전통문화까지 유례없는 관심과 찬사를 받고 있지만 일본은 스페인에 깊고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스페인에서 일본의 위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기에 전혀 놀랍지 않다. 일찍이 반고흐가 일본 그림, 화려한 색채의 판화와 그림에 매료되어 일본인의 눈처럼 그리고 싶다고 고백했듯, 그의 개성 있는 화폭에 일본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듯, 일본은 유럽인의 빈 곳을 채워주던 신비한 동양의 전형이었다. 하기야 이런 일본 그림도 알고 보면 우리 민화와 상당히 닮아 있다. 프랑스의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가 일본 문화에 눈길이 갔듯 스페인에서는 17세기 때 이미 일본어 사전이 출간되었고(Diego Collardo, Vocabulario de la lengua japona, 1632) 스페인의 유명한 극작가 로페 데 베가 등은 일본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9세기 모더니즘 시인, 루벤 다리오는 일본 문화에 진심이었다. 요즈음은 우리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꾸준하게 읽히고, 한국 웹툰 만화 독자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지만 망가는 여전히 스페인 대형 서점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에 흠뻑 젖은 보통 스페인 사람에게 일본의 군국주의나 전쟁 범죄를 입에 올리면, 그것도 한국 사람임을 밝히고 말하면, 진심을 의심하며 일본을 폄하하거나 편견이거나 스페인에 만연한 일본주의를 시기하는 것쯤으로 치부한다. 그래도 조금 양식이 있는 사람은 전쟁 범죄에 관심을 표하며 눈이 퉁방울만 해지며(나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 그저 호기심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나치즘의 히틀러나 파시즘의 무솔리니에 비교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은 일본 전쟁 범죄에 무지하다. 왜 그럴까. 스페인 초중등학교 역사 시간에 나치즘과 파시즘의 피해는 도끼눈을 세우며 열을 올리지만, 일본은 원자폭탄의 희생자라고 가르치고 일본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관점을 흐리는 매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언론과 다르게 스페인의 지식인,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학계는 어떨까. 이차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으로 일본의 전시 폭력과 인권 유린에 대한 스페인 문학의 입장은 스페인 현대 문학 전반을 검토해보아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스페인의 유명한 소설가 둘, 노벨문학상을 타고도 넘칠 역량의 하비에르 마리아스와 그보다 약 한 세대 앞선, 굴지의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한, 후안 마르세의 소설에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비에르 마리아스(Javier Marías, 1951~2022)는 세르반테스의 땅에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여러 영문학의 가치관을 포섭 재현하는 소설가이다. 그가 50대 원숙기에 지은 3부작 ≪당신의 내일 얼굴 Tu rostro mañana≫(2002~2007)은 영국 정보원(MI6)에서 사람의 미래를 해설하는 일을 하는 하이메 데사가 런던과 마드리드를 오가며 겪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신뢰와 배신, 정의, 전시나 평시에 국가와 개인의 폭력, 사랑과 우정, 불확실성과 우연성, 말하기와 침묵, 스페인 근대사와 세계사의 굴곡에 대해 통찰력을 담고 있다. 주인공 하이메 데사는 마리아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번역과 스페인 문학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 ≪올소울즈 Todas las almas≫(1989)의 주인공과 동일한 인물이다. ≪올소울즈≫에서 이름이 없던 주인공은 마드리드로 돌아와 루이사와 결혼해 아들을 두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당신의 내일 얼굴 ≫에서 하이메 데사로*(주 1 더보기) 루이사와 별거하고 아들과 딸을 두고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정보원으로 말을 듣거나,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미래를 - 당신의 내일 얼굴을 - 예상하고 해설하고 설명하는 업무에 종사한다.
*주 1. 하이메 데사(Jaime Deza)는 소설 ≪베르따 이슬라 Berta Isla≫(2017)에서 주인공 베르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영국 정보원에 근무하는 남편 또마스 네빈손(Tomás Nevinson)이 되고, 작가의 마지막 소설, ETA(바스크민족독립단)과 IRA(아일랜드공화국군) 얘기가 있는 ≪또마스 네빈손 Tomás Nevinson≫(2021)으로 정체성이 연속된다. ≪베르따 이슬라≫와 ≪또마스 네빈손≫은 마리아스가 옥스퍼드대학교에 스페인 문학과 번역을 가르친 경험으로 쓴 자서전 같은 소설 ≪올소울즈 Todas las almas≫(1989)로 시작해 ≪올소울즈≫의 창작 과정을 설명한 수필 같은 픽션이 아닌 가짜 소설 ≪시간의 검은 등 Negra espalda del tiempo≫(1998)과 런던에서 영국 정보원 직을 수행하는 3부작 소설 ≪당신의 내일 얼굴 Tu rostro mañana≫(2002~2007)과 함께 옥스퍼드 시리즈에 속하는 소설이다.
≪당신의 내일 얼굴 3 독약과 어둠과 작별 Tu rostro mañana 3 Veneno y sombra y adiós≫(2007)에는 이차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안다만섬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묘사한 장면이 있다.*(주 2 더보기) 안다만(Andaman)과 니코바르(Nicobar)섬은 인도 동쪽 벵골만과 미얀마(버마) 남부에 있는 약 170개의 섬들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영토였고 일본이 영국에 대항하고 동남아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1942년 3월에 점령했다. 무력 상륙 후 일본군은 일본과 독일의 힘을 빌어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인도독립단과 인도독립군을 창설한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를 괴뢰로 내세워 약탈, 강간, 학살을 저지르며 무자비한 통치를 했다. 섬에는 동남아인과 한국인 종군위안부가 있는 위안소가 있었다.
주 2. 마리아스는 소설 ≪베르따 이슬라 Berta Isla≫(2017)에서 '전쟁 범죄'란 현대 용어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다고 했다. 범죄가 없는 전쟁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단 일어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필요한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o concepto moderno de 'crímenes de guerra' es ridículo, es estúpido, porque la guerra consiste sobre todo en crímenes, en todos los frentes y del primer al útilmo día. Así que una de dos: o no se libran, o hay que estar dispuesto a cometer los crímenes que surjan, los que se tercien para alcanzar la victorias, una vez se han empezado. (Berta Isla. 2017. Debosillo. p 273. 5부 3장)
아래는 주인공 하이메 데사를 영국 정보원(MI6)에 추천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스페인 역사와 문학을 가르친, 퇴임 교수 피터 휠러가 이차세계대전 때 영국 정보원과 특수작전부대(SOE)의 스파이로 동남아시아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목격한 일본군의 만행을 하이메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Había visto lo que habían hecho en las Islas Andaman: parte de la población nativa amontonada en barcazas y cañoneada luego desde la guarnición, tiro al blanco, cuando ya estaba en aguas profundas y alejadas; decapitaciones, violaciones terribles, pechos cortados, pero no con machete ni espada, sino desprendidos a bofetones, un desfile de soldados, uno tras otro con todas sus fuerzas, cumpliendo órdenes de un Comandante cuyas atrocidades de años, durante la larga ocupación de las Islas, me tocó investigar cuando las liberamos.
안다만 섬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았지. [일본군들이] 원주민 일부를 바지선에 떼 지어 밀어 넣고 배가 먼 마다 깊은 곳에 이르자 요새에서 과녁을 쏘듯 총알을 퍼부었다. 원주민들은 참수당했고, 무참한 폭력을 당했고, 가슴이 잘려나갔고, 정글칼이나 검이 아니라 두들겨 패서 가슴이 으깨져 떨어져 나갔어, 섬이 점령당한 긴 세월 동안 수년간 도륙으로 다스리던 부대장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이 열을 지어 차례로 하나 둘 나와 온 힘을 다해 때렸지, 언제 섬이 해방되었는지 알아보아야겠어.
일본군의 잔혹한 범죄의 실상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폭력과 무지를 경멸하는 작가는 이 소설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 반란군에 도움을 주고자 행한 폭력과 살인을 비판하며 동시에 일본군의 미개한 폭력을 잊지 않고 알리고 있다. 사실과 상상, 죄와 무죄, 과거와 현재, 기억과 망각, 허구와 역사 등의 양극을 해결하지 않고 모호하게 내버려 두고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일본의 반인류적 범행을 단호한 언어로 기술해서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했다.
후안 마르세(Juan Marsé, 1933~2020)는 그러 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마리아스와 대척점에 선 것처럼 마르세에게 일본은 원자폭탄의 희생자이자 이차세계대전의 피해자이다.
마르세는 1966년에 바르셀로나의 하층민 출신의 좀도둑 마놀라와 상류계층의 아가씨 테레사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테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 Últimas tardes con Teresa≫로 당시 만연했던 객관적 사실주의를 극복한 수작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후 ≪전사통지 Si te dicen que caí≫(1973), ≪상하이의 매력 El embrujo de Shanghai≫(1994) 등의 작품으로 스페인 현대 소설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이다. 2008년에는 스페인어 문학계의 노벨상인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 발표한 ≪도마뱀 꼬리 Rabos de lagartija≫는 1945년 바르셀로나의 하층민의 곤궁한 삶을 통해 스페인내전 후 스페인 사회의 실정을 그린 소설로 비평가상과 국가 소설상을 수상했다. 1945년은 내전의 승리자 프랑코 장군이 독재자로 패배자인 공화군 가담자를 검거하고 처벌과 감시가 횡행했던 시기이자 이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해였다. 공화군에서 싸웠던 아버지가 실종된 채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빨간 머리, 임신한 어머니, 로사와 함께 바르셀로나 산동네에 사는 15살 먹은 소년 다비드 바르뜨라의 이야기이다. 다비드는 늙은 검둥이 개 치스파와 뱃속에 든 남동생과 대화를 하고 행적이 묘연한 아버지나 스페인 내전에서 죽은 의사와 이차세계대전 중 전사한 영국공군 조종사 유령과도 소통을 하며 스페인 내전의 참상과 전쟁의 폭력 등 인간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소설은 어머니가 잉태 중인 태아의 시점 또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쓰였다. 아래는 소설 1장에 주인공 다비드의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태아의 관점으로 형 다비드를 기술하고 있다. 다비드는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를 도와 인형 옷도 만들고 어떤 때는 만들어 놓은 옷도 입어보곤 한다. '치스빠'는 다비드가 키우는 늙은 검둥개이다.
En el cuarto de mamá, por ejemplo, cosiendo vestiditos para muñecas o probándote blusas y toreritas ante el espejo, mirándote de frente y de perfil y seguramente también de culo, y hace mucho calor, es el verano de la bomba de Hiroshima, y por eso, al sonar los golpes en la puerta, le dices a Chispa cuidado, cuando yo abra apártate a un lado, que podría entrar el resplandor atomicio y te quedarías ciego y achicharrado en el acto.
형은 엄마 방에 있을 때 인형 옷을 만들기도 하고 블라우스며 짧은 상의를 거울 앞에 서서 입어보고 앞모습과 옆모습, 그리고 잊지 않고 뒤태 엉덩이도 살펴본다. 아주 덥고 히로시마에 폭탄이 터진 여름이다. 그래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형은 치스빠에게 조심해, 라고 고함을 치고 문을 열 때 한쪽으로 비켜 있으라고 말한다. 원재 광선을** (주 3 더보기) 쏘이게 되면 눈이 멀어지거나 바로 타버릴 수 있으니까.
**주 3. 원자는 atómico가 바른 형태인데 원문에 atomicio로 되어 있다. 다비드의 할머니가 원자 폭탄(bomba atómica)의 원자를 atomicia라고 말한 것처럼 다비드도 원자를 atomicio라고 잘못 말하고 있다. '원재’라고 옮겼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여름이라고 밝혔는데, 일본의 원폭 희생자처럼, 다비드는 원자폭탄이 사랑하는 치스빠에게 피해를 입힐까 걱정을 한다. 원자폭탄은 인간을 파괴하는 악이라는 보편 시각으로 묘사해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는 다비드와 다비드의 동생 태아와 작가, 후안 마르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가엾은 치스빠가 죄 없는 일본인처럼 다치면 안 되는 것이다.
1장을 종결하며 다비드는 뱃속의 아기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다시 경고한다.
¡No te pases de listo, calabacín! ¡Tú no sabes nada ni ves nada ni sientes nada! ¡Si supieras lo que te espera! Todos los bebés que vais a nacer después que ha caído la bomba atomicia, que dice la abuela, naceréis sin agujero en el culo y sin orejas.
꼴값 그만 떨어, 얼뜨기! 아는 게 있어야지! 본 게 있어야지. 넌 뭘 느끼지도 못하잖아! 이 세상에 태어나면 다 알게 될 거야. 원재폭탄이 떨어진 뒤 태어난 아기들은 엉덩이에 똥꼬가 없고 귀도 없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원폭의 피해로 기형아가 출산된다는 상식을 말했지만, 다비드의 동생 태아가 일본의 피폭자처럼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시각을 환기시킨다. 아 불쌍한 피폭자들이여!
2장에 다비드가 사는 바르셀로나 산동네 팔월의 날씨를 언급하며 원자폭탄을 맞아 죽은 원혼이 출몰한 듯 냄새가 나고 비가 내리기도 한다.
El último sábado de este remoto mes de agosto que está resultando tan caluroso y que acabará siendo tan distinguido, tan desdichadamente memorable, a media mañana flota todavía en la atmósfera el azufre atomicio con su repelente olor y su desfile fantasmal de muertos como fundidos en plomo, tiesos y despellejados y sin nariz y sin ojos, pero más tarde vienen nubarrones negros atropellándose, el cielo se desploma y el tufo a pelo churruscado y a huesos calcinados se desvanece bajo la lluvia. Después ha diluviado un buen rato sin parar, y ahora vuelve el bochorno y la luz de la tarde parece un estropajo.
아득한 팔월 마지막 토요일은 무덥고 처참한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날 것인데, 정오쯤에 살가죽이 벗겨지고 코도 눈도 없이 납처럼 녹아내린 뻣뻣한 망령들이 매캐한 유황 가루가 흩날리는 공중에서 줄을 지어 떠나니고, 오후에는 먹구름이 뒤덮고 하늘이 내려앉듯 작달비가 퍼붓고 불에 탄 머리칼과 녹아내린 뼈의 오취가 빗속에 퍼져나간다. 그치지 않고 한참 내리던 장대비가 멈추자 다시 후텁지근하고 수세미로 닦아 놓은 것처럼 오후 햇살이 비친다.
1945년 8월 바르셀로나도 원폭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처럼 유황 가루가 날리고 비릿한 악취가 풍기며 망령이 떠도는 곳이다. 아, 애처로운 히로시마여, 나가사키여, 일본이여, 여기 바르셀로나, 스페인도 원자폭탄 폭격을 맞은 듯 고통스럽다고 했다.
4장에 스페인 내전 중 죽은 이비인후과 의사의 유령에게 다비드는 이명 증세를 설명하며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영향이 아닌지 상상한다.
...¡hostia puta, qué es esto!, grité,¡qué cosas más raras pasan dentro de mis pobres orejas! ¿Se me habrá metido una abeja, o un grillo? ¿Será la sirena que anuncia otro bombardeo? ¿Un caza Spitfire cayendo en picado? ¿El silbido atomicio sobre Hiroshima? Pero mucho antes de oír todo eso, me entró el silbido de otra clase de bomba.
...아 씨발! 무슨 일이야! 내 귀가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벌이 들어왔나 아니면 귀뚜라미가 들어왔나? 아니면 또다시 폭격기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인가? 스피트파이어 전투기가 곤두박질하는 소리인가? 히로시마에 원재폭탄이 낙하하는 소리인가? 그러나 이런 소음들이 들리기 전에 저 귀에는 다른 폭탄 소리가 벌써부터 났습니다.
원자폭탄은 다비드가 이명이 생긴 원인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다비드는 피폭자의 고통을 몸소 느끼는 '착하고 반듯한' 소년이다.
원자폭탄은 다비드가 아끼는 검둥개 치스빠와 그 자신을 해칠 뿐 아니라 태아에게도 나쁘며, 임신중독증으로 죽는 어머니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서사를 이어가는 후안 마르세는 태평양전쟁의 일본군을 피해자로 기술함으로써 일본은 전쟁의 희생자란 플롯을 마침내 완성한다.
9장에 다비드는 친구 빠울리노와 함께 영화관에 갔는데, 다비드는 빠울리노와 함께 실종된 다비드의 아버지 소식을 전해주는 영사기 기사를 만나러 영사실로 올라갔다. 영사실에 노크를 했지만 전쟁 영화의 소음 때문에 기사는 반응이 없었다. 상연되고 있던 영화는 이차세계대전 중 호주 동북부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있는 솔로몬제도 과달까날섬에서 벌어졌던 일본군과 연합군의 전투였다.
과달까날섬에 일본군은 1942년에 호주의 동해안과 미국의 서해안을 공격하기 위해 한국인 강제노동자를 포함된 인력으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던 전략 요충지였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은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섬과 바다에서 교전을 벌여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괴멸시키며 승리해 향후 일본 제국의 멸망을 촉발한 전투였다.
Sigúeme, dice David, y salen al vestíbulo, burlan la vigilancia del portero, suben a la primera planta y buscan la cabina de proyección. David golpea con los nudillos una puerta pequeña, que se abre suavemente no más de un palmo. El zumbido del proyector, el traqueteo de las ametralladoras en una playa del Pacífico, los aullidos de los japoneses ensartados en las bayonetas, o cayendo a plomo de las palmeras, ahogan la llamada en la puerta. David se dispone a golpear de nuevo y más fuerte, cuando dentro se oye una voz de mujer, pastosa y dulce, como si hablara comiendo un plátano, se le ocurre decir a Paulino: una voz que parece salida de la película. La novia de un soldado de Guadalcanal, añade en un susurro. Qué dices, no hay mujeres comiendo plátanos en una película de guerra, capullo, dice David. Entonces es la novia del proyeccionista.
따라와, 다비드는 빠울리노에게 말한다. 현관으로 나와 문을 지키는 감시를 따돌리고 이층으로 올라가 영사실로 간다. 영사실의 작은 문을 손가락 마디로 두드리니 문이 한 뼘 정도 스르르 열린다. 윙윙거리는 영사기 소리와 태평양의 해변에서 기관총이 다닥거리며 불을 뿜고 대검에 찔린 일본군의 비명 또는 야자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우성이 노크 소리를 집어삼킨다. 다비드는 다시 세게 노크를 했는데 안에서 바나나를 먹으면서 말하는 듯 부드럽고 늘큰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고 빠울리노가 말한다. 그러더니 빠울리노는 과달까날 전투를 하는 군인의 여자친구라고 낮게 말한다. 헛소리 하지 마, 전쟁 영화에는 바나나를 먹는 여자들이 나오지 않아, 병신새끼, 라고 다비드가 맞받아친다. 그러면 이 여자는 영사 기사의 여자친구이다.
다비드와 빠울리노는 영사 기사를 만나기 위해 영사실 문을 두들겼으나 전쟁 영화 소리 때문에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비드가 다시 크게 문을 두드리니 이번에는 바나나를 먹으면서 말을 하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났는데, 빠울리노는 영화 속에 군인의 여자친구가 내는 소리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다비드는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과달까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였고 대검에 찔리거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본군의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 연합국 공격에 피해를 입는 일본군을 묘사했다.
영사 기사는 여자 친구인지 몸을 파는 여자와 함께 영사실에 있는데, 문이 열린 것을 알아채고 발로 차 닫아버렸다. 하지만 목구멍에 경련이 나도록 외치는 일본군의 고통 소리는 희미하게 들렸다.
...el proyeccionista acaba de ver que la puerta está entreabierta, y le da una patada, cerrándola, pero aun así, ya cuando remite en la playa el fragor de la batalla y son más débiles los agónicos espasmos guturales de los soldados japoneses.....
...영사 기사는 삐죽하게 열린 문을 보고 발로 차서 닫아버렸지만 해변의 격렬한 전투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일본군의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마리아스는 일본군을 점령지 섬의 주민을 학살한 주체로 고발한 반면 마르세는 연합군 공격을 당하는 피해자로 일본군을 묘사했다. 전쟁을 일으켜 주변국을 침략하고 폭력과 살상을 저지른 일본의 범행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작가의 관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르게 보인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시각을 투사한 후 따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비난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마리아스의 ≪당신의 내일 얼굴 Tu rostro mañana≫이 던지는 한 가지 메시지는 전시나 평시에 국가나 개인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인 만큼 소설은 이차세계대전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일차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동안 있었던 부당한 힘의 사용을 비판했다. 반면 마르세의 ≪도마뱀 꼬리 Rabos de lagartija≫는 스페인내전 종료 후 이차세계대전 중이던 바르셀로나의 삶을 그리면서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를 도운 독일 나치를 비판하지만 독일과 같은 추축국으로 연합국 군인과 민간인을 짓밟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외면하고 전쟁의 피해자와 원자폭탄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철학자 아버지와 번역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이 미국 대학에서 가르칠 때 미국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19세에 ≪늑대의 영토≫란 첫 소설을 발표하였고 ≪올소울즈≫, ≪새하얀 마음≫, ≪시간의 검은 등≫,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등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스페인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반면, 후안 마르세는 양부모의 손에서 자랐고, 반프랑코주의자 양아버지 덕분에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찌기 직업전선에 뛰어 들어 어머니를 도와 가정을 꾸려나가며 스스로 글쓰기를 시작해 성공한 소설가였다. 그래서 그런지 마리아스가 쓴 소설의 인물들은 통역가, 번역가, 출판사 편집장, 오페라 가수, 시나리오 작가, 대학 교수 등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만 마르세의 인물들은 보통 스페인 시민이나 하층민과 창녀와 같이 사회 주변 계층이다. 또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다르다. 마리아스의 서사는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일어난 순간 인물들의 생각이 꼬리를 무는 내적 독백이 이어지고 때론 주제에서 벗어난 한담이나 한눈팔기로 혼랍스럽고,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반면 마르세는 멜로드라마처럼 인물이 느끼는 정서나 감정을 구축하고 끌고 가는 능력이 뛰어나다.*(주 4 더보기) ≪도마뱀 꼬리 Rabos de lagartija≫에서 다비드의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이나 다비드의 친구 빠울리노가 외삼촌으로 당한 성폭력으로 괴로워할 때나 20살의 다비드가 경찰을 피해 도주하다 전차 사고로 죽어가는 장면에 목이 먹먹해지는 독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르세는 심금을 울리는 소설가이고 마리아스는 머리를 깨우며 가슴을 울리는 소설가이다. 어느 쪽이 머리에 더 오래 맴돌지는 순전히 독자의 취향에 달려 있다.
*주 4. 그렇다고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감정이나 정서에 둔감하다는 말이 아니다. 마르세는 연속극처럼 인물이나 사건이 독자의 가슴을 자극하도록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반면, 마리아스는 감정이나 생각을 분석해 의식의 흐름이나 내면 독백으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거나 사건의 정감을 기술하는 데 탁월하다. 특히 여자가 주인공인 ≪베르따 이슬라≫와 ≪사랑에 빠지기≫는 미세한 정서와 미묘한 느낌이 향연을 펼치는 소설이다.
보통 스페인 사람이 어느 소설을 선호할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이야기 전개가 산만하며 다층적인 의미를 쌓는 마리아스보단 감정선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이야기 줄거리에 집중하며 현실과 이상을 적절히 버물려 놓은 마르세에 손이 더 자주 갈 것 같다. 전범 일본을 보통 스페인 성인과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더 알려야 하는 데에는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이 있어 안심이다. 하지만 일본의 전쟁 범죄를 옹호하는 마르세는 괜한 우려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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