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마리아스(Javier Marías, 1951~2022)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Mañana en batalla piensa en mí≫의 5장은 주인공 시나리오 작가 빅토르가 스페인 국왕의 연설문을 대필하기 위해 왕을 접견하는 장면이다. 빅토르는 마르타의 아버지, 스페인 왕립학술원의 회원으로 왕과 친분이 있는 테예스 씨와 동행했다.
국왕은 개성이 반영된 연설문을 원했고 이어서 정의와 입헌군주제와 인생의 허무 등에 대해 말했다. 마리아스의 소설은 늘 진지함과 익살 또는 근엄함과 반어가 공존하듯, 왕과의 대화는 딱딱하고 엄숙하지만 동시에 배석한 왕의 여비서는 스타킹의 줄이 나가고, 멀치감치 떨어져 왕을 그리고 있는 궁중 화가의 말과 접견실을 지키는 늙은 궁지기의 행동,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테예스 씨, 손가락 상처를 보호하는 밴드를 부친 왕 때문에 웃음을 자아낸다.
왕이 상유(上諭 왕의 말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접견실 문이 열리고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아주 연세가 많은 노파 청소부(una mujer de la limpieza bastante mayor)가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Souls(소울즈, 지존)는 국왕의 별명, Anita(아니타)는 왕의 비서, Segarra(세가라)는 문을 열어주고 손님을 맞이하고 왕궁을 관리하는 궁지기나 청지기, Téllez(테예스)는 마르타의 아버지, 빅토르와 동행한 왕립학술원 회원
Se abrió entonces la puerta por la que habían entrado Solus y Anita, y por ella apareció una mujer de la limpieza bastante mayor y de aspecto montaraz y malhumorado. Llevaba un plumero y una escoba en las manos y se deslizaba algo encorvada sobre dos paños para no pisar el suelo con las suelas de sus zapatillas, por lo que avanzó muy lentamente como si fuera una esquiadora sobre la nieve compacta con un solo bastón muy largo y el otro muy corto. Nos volvimos todos atónitos a contemplarla en su interminable progreso, con su pelo suelto blanco que tanto avejenta a las viejas, y la conversación quedó un minuto o dos en suspenso porque ella tarareaba con mala voz durante su marcha absorta; hasta que por fin Segarra, cuando la limpiadora llegó a su altura, la cogió del brazo con su guante blanco - de pronto como una zarpa - y le dijo algo en voz baja al tiempo que nos señalaba. La mujer dio un respingo, nos miró, se llevó una mano a la boca para ahogar una exclamación que no fue emitida y apretó cuanto pudo el paso hasta desaparecer por la primera puerta, la que nos había introducido a mí y a Téllez hacía rato. 'Parecía una bruja', pensé, 'o quizá una banshee: ese ser sobrenatural femenino de Irlanda que avisa a las familias de la muerte inminente de alguno de sus miembros.
그때 지존과 아니타가 들어왔던 문이 열렸고 강퍅한 산골 노파 같은 여자 청소부가 나타났다. 손에는 깃털 먼지떨이와 빗자루를 쥐고 신발로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등을 구부린 채 걸레 두 장에 발을 올리고 미끄러지듯 한 손에는 긴 폴과 다른 손에는 아주 짧은 폴을 잡고 단단한 눈 위를 지치는 스키어처럼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질겁해서 고개를 돌려 느적느적 끝이 없을 것 같이 다가오는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산발한 흰머리로 그녀는 더 늙어 보였고 정신줄을 놓고 다가오며 박자도 맞지 않는 둔한 목소리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렸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마침내 청소부가 세가라 가까이 다다르자 그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살쾡이처럼 휙 잡아채고는 우리를 가리키며 뭐라고 소곤거렸다. 놀란 청소부는 멈칫 우리를 쳐다보더니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아주 잰걸음으로 내가 얼마 전에 테예스 씨와 같이 들어왔던 첫 번째 문으로 총총 사라졌다. '마녀 같군, 아니 밴시일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밴시는 가족 중에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있으면 가족에게 알려주는 아일랜드의 초자연적인 여자 요정이다. (필자 번역).
아래는 문학과 지성사의 번역이다.
그때 '유일무이'와 아니타가 들어왔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성격이 거칠고 과팍해 보였다. 손에는 깃털 달린 먼지떨이와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슬리퍼로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등을 구부린 채 미끄러지듯이 살그머니 걷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긴 폴을, 다른 한 손에는 아주 작은 폴을 들고 눈 위를 지치는 스키어 같았다. 너무 놀란 우리는 고개를 돌려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흰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탓에 더 늙어 보였다. 우리의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그녀가 넋을 잃고 앞으로 다가오면서 음정도 맞지 않는 목소리로 노랫가락을 흥얼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늙은 여자 청소부가 가까이 오자, 세가라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날쌘 고양이처럼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우리를 가리키며 조그만 소리로 뭐라고 말을 했다. 청소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우리를 바라보고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막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얼마 전에 나와 테예스 씨가 들어왔던 문으로 사라졌다. '마녀 같군, 아니면 밴시인지도 몰라.' 나는 그 순간 가족 중의 누군가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초자연적인 여자 요정 '밴시banshee'를 떠올렸다. (내일 전쟁터 나를 생각하라. 문학과 지성사. 2014. 198-9쪽).
노파 청소부 또는 할머니 청소부(una mujer de la limpieza bastante mayor 상당히 나이가 든 할머니 청소부)를 문지사는"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라고 옮겼다. una mujer bastante mayor는 '나이가 상당히 든 여자', 즉 할머니 또는 노파 아니면 늙은 여자이다. mayor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viejo(노인, 늙은이), vieja(노파, 노인, 늙은이)를 완곡하게 일컫는 말로 일종의 존대어이기도 하다. 그러면 bastante mayor는 '충분히 연세가 든 노파'이란 뜻이다. 우리 문화를 고려하면 '연세가 많으신 여자 어르신',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라고 옮길 수도 있겠다.
'할머니 청소부' 또는 '노파 청소부', 또는 '나이가 아주 많은 할머니 청소부', 아니면, 어색하지만 '연세가 지긋한 여자 어르신 청소부'라고 번역해야 할 것 같은 una mujer de la limpieza bastante mayor를 문지사는 무슨 이유로 "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여인"으로 번역했을까. 단순하게 오역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데, 뒤에 나오는 la limpiadora를 "늙은 여자 청소부"로 옮겨 처음 언급된 una mujer de la limpeiza bastante mayor와 동일 인물임을 역자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면 최초로 언급된 una mujer de la limpeiza bastante mayor를 '연세 드신 여자 청소부'라고 하는 대신 "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여인'으로 옮긴 것은 뒤에 등장하는 la limpiadora와 대비된 반어나 해학 효과를 주기 위해 역자가 창조력을 발휘한 것일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그럴 수 없다고, 오역을 옹호하는 억지 논리라고 반박할 수 있으나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역자의 창의적 번역을 존중하고 싶다면 저자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una mujer de la limpieza를 과연 역자의 의도처럼 아이러니나 유머를 위해 '깨끗한 옷을 입은 여인'이란 뜻으로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확인해 보자. 우선 mujer de la limpieza (여자 청소부)는 보통 señora de la limpieza(청소부 아줌마)라고 하고 (여성 관사 la는 생략을 할 수 있다), 청소부가 젊은 여자이거나 친근한 말투로 chica limpieza라고 간단히 말한다. mujer/mujeres de la limpieza는 생소한 표현은 아니다 (아래 구글 검색 참조).
limpieza는 물론 '깨끗하다'라는 형용사 limpio, limpia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una mujer de la limpieza(여자 청소부)는 "깨끗한 옷을 입은 여자(una mujer vestida de ropa limpia)"를 암시하거나, 청소부가 정말 깨끗한 옷을 입었다는 아이러니 효과를 의도했다면 문지사의 번역은 설득력이 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작고했기 때문에 직접 물을 수 없고, 이 소설을 옮긴 다른 언어 번역본을 보면 저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프랑스어본을 살펴보자.
영어본은 una mujer de la limpieza bastante mayor를 an elderly cleaning woman '연세가 든 여자 청소부' (mayor가 존중하는 뜻이기 때문에 old 보다 존대어 형용사 elderly를 썼다)로 옮겼다. la limpiadora는 the cleaning lady(여자 청소부)로 번역했다(마르가레트 훌 코스트라 Margaret Jull Costra 옮김, Tomorrow in the battle think on me. 1996. 127쪽).
이탈리아어본은 una donna delle pulizie abbastanza anziana(나이가 충분히 많은 노파 청소부)로 옮겼고, la limpiadora는 la domestica(하녀, 가정부)로 번역했다 (글라우코 펠리치 Glauco Felici 옮김, Domani nella battaglia pensa a me. 1998. 113쪽).
프랑스어본은 une femme de ménage assez âgée (나이가 꽤 많은 여자 청소부)로 옮겼고, la limpiadora는 대명사 elle(그녀)로 번역했다 (알랭 케후소헤 Alain Keruzoré 옮김, Demain dans la bataille pense à moi. 1994. 145쪽).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번역본은 una mujer de la limpieza를 모두 여자 청소부 an [elderly] cleaning woman, una donna delle pulizie, une femme de ménage로 옮겼다. 이 청소부가 말끔한 옷을 입은 여자로 반어나 모순이나 유머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역자들은 인식했다. 마리아스는 할머니 청소부에게 아주 깨끗한 옷을 입히기보다는 허리를 숙이고 청소도구를 들고 걸레 위에 발을 올린 채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행동으로 재미를 주는 익살을 부렸다. 문지사는 발을 올리고 있는 '걸레 두 장 위(sobre dos paños)'는 번역하지 않았다.
또한 'de aspecto montaraz y malhumorado를 문지사는 "성격이 거칠고 괴팍해 보였다"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montaraz는 물론 비유적으로 '거칠다' '난폭하다'란 뜻이지만 '산에서 자란', '산으로 다니는'란 기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산골 사람 같은'이라고 옮길 수 있고 malhumorado는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는 뜻의 '괴팍하다'와 유사한 의미의 '강퍅하다'라고 옮겨도 된다.
강퍅한 산골 노파 같은 청소부가 아니라 성격이 거칠고 괴팍한 '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접한 한국의 독자는 금세 이 여인이 '늙은 여자 청소부'인 것을 알고 대조되는 두 여자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겠지만, 이는 원본에 있는 사실이 아니다. 마리아스는 단순히 '여자 어르신 청소부'라고 밝힌 것뿐인데 역자는 마리아스의 소설에는 늘 모종의 반어나 모순이나 풍자나 유머가 숨어 있다는 가정에 사로잡혀 텍스트에 너무 과도하게 집중한 탓에 "아주 깨끗한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인'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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