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밀로 호세 셀라 (Calmilo José Cela, 1916 ~ 2002)의 소설 <벌집 La Colmena>(1951)의 번역 일부를 읽어 보자.
"콧수염을 기른 피델은 밝은 연녹색 넥타이를 맸다. 그는 젊었을 적에 몸에 이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장기에 염증이 생겨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교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순진하지만도 않게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왔다. 사실 운도 따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과점에 오가는 고객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염증이 조금씩 치료되었다. 그즈음에는 끈적끈적한 노란색 크림이 범벅인 비스킷을 보기만 하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구토 증세를 느끼곤 했다." (남진희 옮김. 민음사 2015: 274)
위 번역에 따르면 피델은 빵집을 운영했고, 젊었을 때 장염에 걸려 고생을 했고, 그런 연유인지 간사하고 꾀를 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순박하지도 않게 그럭저럭 살았고, 운이 없었고, 빵집 손님들 때문에 한탄을 하지 않았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병이 나았고, 그 시절에 황색 크림이 들어간 비스킷을 보면 구역질이 났던 것이다.
왜 병에 걸렸는지, 어떻게 나았는지, 노란 비스킷이 구역질을 유발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숱한 신비와 수수께기가 담긴 게 소설이라고, 아니, 삶이라고 생각하면 번역은 무탈하게 읽힌다. 그럴까. 원본을 보자.
Fidel es un muchacho joven que lleva bigotito y una corbata verde claro. De adolescente tuvo algún trastorno en su organismo, más bien unas purgaciones, por andarse de picos pardos sin ser ni listo ni limpio, La verdad es que tampoco tuvo demasiada suerte. Se lo guardó todo bien callado, para que no tomaran aprensión los clientes de la confitería, y se las fue curado poco a poco con sales de mercurio en el retrete del casino. Por aquellas fechas, al ver las tiernas cañas de hojaldre rellanas de untuosa, amarillita crema, sentía una náuseas que casi no podía contener.
바르게 옮기면 아래와 같다.
"청년 피델은 짧게 콧수염을 길렀고 연녹색 넥타이를 맸다. 그는 청소년 때 병을 앓았는데 어리석고 지저분하게 청등홍가를 들락거리는 바람에 임질에 걸렸다. 사실 운이 없었던 것이다. 제과점 손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병을 함구하고 카지노 변소에서 수은염을 복용한 덕택에 점차 병이 나았고 병을 치료하던 그때 노란 크림이 몽글몽글 넘치는 부드러운 카냐 빵을 보면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을 하곤 했다."
민음사의 번역과 다르게 원본은 발병 원인, 치료 방법, 치료할 당시 크림빵이 왜 구역질을 유발하는지 논리가 정연하다. 피델은 장염이 아니라 임질을 앓았고, 어리석고 지저분하게 홍등가를 들락거리다가 성병에 걸렸고, 제과점 손님 몰래 카지노 변소에서 수은염으로 치료했고, 병을 치료할 당시 노란 크림 범벅 빵을 보면 구토를 참지 못하곤 했다. 요도에서 나오는 고름이 누런 크림 같았기 때문이다.
임질(purgaciones)을 장염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병의 원인과 치료와 구역질의 상관 관계를 보지 못한 오역이 탄생한 것이다.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역자의 도덕 관념이나 신념 때문에 임질을 장염이라고 견강부회했을 수 있다. 아니면 번역에 창의성을 발휘해 번역을 하는 대신 원본을 '반역'했을 수도 있다. 불가사의하다.
원본과 민음사의 번역 차이를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첫째, purgaciones는 임질이다. 아래 스페인왕립학술원 스페인어사전(DRAE)은 purgación을 '막의 점액 유출, 주로 요도, 보통 복수형으로 쓴다 (flujo mucoso de una membrana, principalmente de la uretra. U. m. en pl.)'라고 풀이했다. 성병 임질(gonorrea)을 설명했다.
옥스퍼드 스페인어사전은 purgaciones을 "요도와 생식기에 감염으로 고름이 상당히 나오는 성관계로 전염되는 질병"이라고 했다.
임질(淋疾)을 표준국어대사전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 여자는 동시에 방광염을 일으키며 내부 생식 기관에 염증을 일으키고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질을 "장기 염증"으로 오역한 것은 엣센스 스페인어사전이 purgación을 '설사'라고 오역한 것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설사는 diarrea, cagalera, cursos, cagarria이다.
둘째, 관용구 andarse de picos pardos를 민음사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왔다"라고 옮겼지만 사실, 업소에 출입하다,라는 뜻도 있다. pico는 치마 장식이고 pardo는 고동색인데 피코가 있는 흙색 치마를 입은 사람은 창녀이다. 매춘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세부터 아랫녘장수들은 특정한 색의 피코가 있는 치마를 입어야 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andarse de picos pardos는 업소에 들락거린다는 관용구가 된 것이다. 위키날말사전은 irse de picos pardos를 오래된 관용구로 영어로 "to go out whoring"이라고 했다. whore는 매춘부이고 whoring은 매춘부와 오입하는 것을 뜻한다.
엣센스 스페인어사전은 andarse de picos pardos를 "평판이 나쁜 곳에 놀러 다니다" 또는 "어칠비칠 살아가다"라고 했는데 이는 RAE의 "ir de juerga o diversión a sitios de mala nota"를 직역하거나 각색 번역한 것이다. '어칠비칠 살아가다'는 뜻매김 때문에 민음사 번역본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왔다"라는 비유 표현을 만든 것 같다.
그리고 sin ser ni listo ni limpio는 민음사의 번역처럼 피델이 장염이 걸려 "교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순진하지만도 않게"가 아니라, 어리석고 (sin ser ni listo 간사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sin ser ni limpio 깨끗하지 않고)란 뜻이다. 그러면 por andarse de picos pardos sin ser ni listo ni limpio는 '바보처럼 지저분하게 흥청망청 청루의 노류장화와 어울리다 보니'라고 옮겨진다. 화류계에 관계를 한다고 모두 성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수가 없었다 (tampoco tuvo demasiada suerte)'라는 말을 첨가한 것이다.
셋째, 피델은 임질을 수은염 (sales de mercurio)으로 치료했다. 성병을 누구에게 알릴 수 없었을 것이고 카지노의 변소에서 몰래 수은염을 복용해서 나았다. 옛날에 매독(sífilis)과 임질(gonorrea)은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 수은염 또는 비소로 치료하곤 했다. 수은염으로 임질을 다스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아니면 이해를 했지만 이해하기 싫었든지, 민음사 번역은 con sales de mercurio en el retrete del casino를 송두리째 생략해버렸다.
마지막으로, 민음사 번역에 "노란색 크림이 범벅인 비스킷"은 사실 비스킷이 아니라 노란 크림이 뭉글뭉글 꽉 찬(rellanas de untuosa, amarillita crema) 부드러운 카냐 빵 (las tiernas cañas de hojaldre)이다. 이런 빵을 보고 구역질을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부드럽고 길쭉한 빵은 축 늘어진 피델의 남근 같았고 삐져나온 누런색 크림은 면역계의 반응으로 임질균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혈구의 시체인 고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오역의 원인은 오리무중이고 번역을 한 역자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위 단락의 소통 오해는 성병 임질(purgaciones)을 '설사' 또는 '장기 염증'으로 본 착각에 뿌리가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andarse de picos pardos (유곽에 들락거리다)를 번역하기 위해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고, 카지노의 변소 (el retrete del casino)와 수은염 (sales de mercurio)을 생매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런 크림이 꾸물꾸물 나오는 기다란 카냐 빵이 어리석고 추접스러운 흥청망청 때문에 임질에 걸린 피델의 성기를 비유하는 익살을 즐기지 못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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