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음식을 먹는 저녁 식사

스페인에서 저녁 식사(cena)는 저녁 9시경에 먹는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난 뒤 느긋하게 저녁 9시 뉴스를 볼 시간이지만 스페인에서는 이때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는 사람이나 집안마다 다르겠지만, 따뜻한 음식을 먹는 대신 차가운 음식을 먹을 때가 있다. 이렇게 찬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을 말 그대로 cena fría(저녁 식사, 찬)라고 한다. 

형용사 frío, fría는 태도나 정감이 차갑거나 쌀쌀하거나 냉담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cena fría는 훈훈하고 정겹게 먹는 저녁이 아니라 싸늘한 분위기에서 먹는 저녁 식사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cena fría는 찬 음식으로 준비된 저녁 식사이다. 

가장 간단한 차가운 저녁 식사는 빵, 치즈, 소시지, 하몬, 채소 샐러드, 포도주 (또는 맥주, 사과주 sidra)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접시의 왼쪽에 연치즈, 부드러운 프랑스 치즈, 보통 치즈가 있고 오른쪽은 하몬 세라노 jamón serrano, 하몬 데 요르크 jamón de york(삶은 하몬), 칠면조 가슴살 pechuga de pavo, 초리소소시지 chorizo, 살라미소시지 salami, 푸엣소시지 fuet, 모르시야소시지 morcilla(돼지피 소시지)가 있다. 보통 집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먹지 않겠지만 호텔의 뷔페 저녁으로 이 정도는 기본이다.

이런 찬 음식의 저녁 식사는 소설에도 흔하게 등장한다.  아래는 후안 마르세(Juan Marsé, 1933~2020)의 소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 Últimas tardes con Teresa≫(1966)에  주인공 마놀로와 떼레사가 보리 부부의 집에서 먹는 저녁 식사이다.

....una frugal pero ceremoniosa cena fría (ensalada, lomo, quesos franceses y buen vino tinto servido en originales  jarritos de barro, en una mesa baja con apliques de esmalte).....

....간단하지만 격식을 갖춘 차가운 음식으로 차린 저녁식사(에나멜 등 아래 낮은 식탁에 샐러드, 돼지 등심, 프랑스산 치즈, 작은 질그릇 피처에 담긴 좋은 적포도주)....(소설 3부 4장)

lomo는 양념을 해 소시지 모양으로 숙성한 돼지 등심 lomo embuchado인데, 썰어서 그대로 먹거나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 

lomo embuchado

aplique는 아래 RAE의 1번 정의처럼 벽에 다는 등이나 촛대이다. 

벽에 다는 등 aplique (구글 이미지)

창작과 비평사는 아래처럼 옮겼다.

...소박하지만 격식을 차린 저녁식사(낮은 칠보식탁 위에 놓인 쌜러드, 등심, 프랑스산 치즈, 질그릇 항아리에 담겨 나온 적포도주)는.....(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창작과 비평사. 2016. 451쪽)

cena fría를 재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낮은 식탁(una mesa baja)은 에나멜(칠보) 등과 함께(con apliques de esmalte) 있다고 했다. 즉 벽에 달린 에나멜 등 아래 낮은 식탁이 있다. 하지만 창비사는 에나멜 등을 생략하고 "낮은 칠보식탁"으로 오역했다. 

샐러드, 등심, 치즈는 따뜻한 음식이 아니라 차가운 음식이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fría를 번역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fría는 쌀쌀한 느낌이 드는 저녁 식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고, 이런 애매하거나 불확실한 것은 옮기지 않고 생략한다는 번역 전략을 구사한 것일 수 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Javier Marías, 1951~ 2022)의 소설 ≪베르따 이슬라 Berta Isla≫(2017)에 베르따가 영국 정보원에 근무하는 남편 또마스 네빈손이 마드리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장면에 찬 음식의 저녁 식사가 등장한다. 

Decidí aguardarlo en casa, con algo de cena fría, esperar a oír su llave, o el timbre si la había perdido, es fácil perder u olvidar una llave que no se utiliza ni de nada sirve durante un par de meses o más... 

베르따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가운 음식으로 된 저녁 식사를 조금 준비 해 놓고, 열쇠로 문을 열거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열쇠를 잊어버렸다면, 초인종을 누를 것인데, 열쇠는 몇 달 또는 긴 세월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기 마련이니까....(4부 4장)

 cena fría는 구체적인 음식을 열거하며 사용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아래도 cena fría만 사용된 예이다.

불의 밤에 연주회와 찬 음식의 저녁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