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마리아스(Javier Marías, 1951~2022)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Manaña en la batalla piensa en mí>(1994)는 잘 모르는 여자가 품 안에 안겨 죽을 수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인 빅토르 프란세스, 시나리오 작가이자 대필 작가는 만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유부녀 마르타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안방에서 로맨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돌연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반나체 상태로 그의 팔에 안겨 죽어버린다. 출장을 간 마르타의 남편에게 전화 연락을 했으나 통화하지 못하고 그녀의 잠든 어린 아들에게 음식을 챙겨주고 집을 빠져나온다.
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사건을 되새기며 죽음의 정황이 때론 알려지지 않을 때가 있다며 창피스러운 죽음의 사례를 들고 있다.
....a los vivos y al que se muere - si tiene tiempo de darse cuenta - les avergüenza a menudo la forma de la muerte posible y sus apariencias, también la causa. Una indigestión de marisco, un cigarrillo encendido al entrar en el sueño que prende las sábanas, o aún peor, la lana de una manta; un resbalón en la ducha - la nuca - y el pestillo echado del cuarto de baño, un rayo que parte un árbol en una gran avenida y ese árbol que al caer aplasta o siega la cabeza de un transeúnte, quizá un extranjero; morir en calcetines, o en la peluquería con un gran babero, en un prostíbulo o en el dentista; o comiendo pescado y atravesado por una espina, morir atragantado como los niños cuya madre no está para meterles un dedo y salvarlos; morir a medio afeitar, con una mejilla llena de espuma y la barba ya desigual hasta el fin de los tiempos si nadie repara en ello y por piedad estética termina el trabajo; por no mencionar los momentos más innobles de la existencia, los más recónditos, de los que nunca se habla fuera de la adolescencia porque fuera de ella no hay pretexto, aunque también hay quienes los airean por hacer una gracia que jamás tiene gracia.
산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은 - 의식을 하고 있다면 - 가능한 죽음의 형태와 모습과 죽음의 원인을 종종 수치스러워한다. 해물을 먹다가 체해 죽거나, 담배를 피우다가 잠이 들어 시트에 불이 붙거나, 더 고약하게, 양모 담요에 불이 붙어 죽거나, 샤워를 하다 미끄러져 넘어져 - 목덜미 - 욕실 문은 걸쇠로 잠겨 있어 죽거나, 큰길의 가로수가 벼락으로 쓰러져 행인을 아마 이방인을 납작하게 하거나 머리를 거두어버리거나, 양말만 신은 채 죽거나, 큼직한 머리받이를 하고 이발소에서 죽거나, 사창가에서 죽거나, 치과에서 죽거나, 생선을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넣어 구해줄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처럼 음식을 먹다 숨이 막혀 죽거나, 면도를 하다가 볼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죽어 미관상 연민이 생겨 누군가가 살펴보고 못다 한 면도를 끝내주지 않으면 꼴사나운 수염은 내내 남기며 죽거나, 존재의 가장 천박하고 깊이 숨기고 싶은 순간에 죽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진대, 사춘기가 지나면 변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말하지 않는 죽음이 있고, 재미있지 않은 것을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다. (필자 번역)
아래는 문학과 지성사의 번역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들 - 이런 사실을 깨달을 시간이 있을 경우에 - 모든 이런 식의 죽음과 그 상황에 당황해하고, 원인 때문에 황당해한다. 해물을 먹다가 체하거나, 아니면 담배를 피우다가 잠들어 침대 시트를 태우거나, 좀 더 심할 경우에는 양털 모포가 타서 죽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샤워를 하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뒤도 넘어져 목뼈가 부러지는 데다 화장실 문이 잠겨 죽을 수도 있으며, 큰길의 가로수가 벼락을 맞아 쓰러지면서 행인이나 혹은 이방인의 머리를 덮치거나 부숴버릴 수도 있다. 심지어 팬티만 입은 채 죽을 수도 있으며, 가운을 입은 채 이발소에서 죽을 수도 있고, 사창가나 치과병원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 목숨울 구할 틈도 없이 죽은 어린아이들처럼 음식을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여 질식해 죽는 수도 있다. 또한 면도 거품을 뺨에 잔뜩 칠한 채 면도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이를 경우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지도 않거나 망자의 추한 모습에 동정심을 느껴 망자가 하다 만 면도를 끝내주지 않으면, 망자의 수염은 영원히 엉망으로 남게 된다. 그러니 사춘기를 벗어나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생에서 가장 불명예스럽고 가장 비밀스러운 순간에 죽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건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그 어떤 핑계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재미있지도 않은 것을 재미있게 말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문학과 지성사.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2014, 9-10쪽)
일어날 법하지 않은 황당한 죽음을 열거하다 마지막에 우리가 가장 품위가 없고(más innobles) 가장 은밀한(más recónditos) 일을 하다 맞이한 죽음은, 가령 뒷일을 본다거나 코를 푼다거나 마르타처럼 빅토르와 반쯤 벗고 사랑을 시작하다 죽으면, 청소년이라면 뭐라고 변명을 둘러대겠지만 성년이 되어서는 절대 입밖에 꺼내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morir en calcetines (문자 그대로, 양말을 신고 죽다)가 왜 창피스러운 것인지 선뜻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에스파냐에선 죽을 때 양말을 벗어야 하는지, 수의를 입히다가 신기지 않아야 할 양말을 신긴 것인지, 병자성사의 마지막도유를 하기 위해 맨발이어야 하는지 등 여러 추측을 낳는다. 하지만 이는 알몸에 양말만 신은 채 죽은 것을 뜻한다. 에스파냐의 주거 환경은, 무더운 여름이 아닌 경우, 집에서 우리처럼 맨발이 아니라 양말을 신고 실내화를 신고 지낸다. 샤워나 목욕을 할 때나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 양말을 벗지 않는다. 물론 잠자리에 들며 양말을 벗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할 때 위에서 아래로 옷을 벗다가 마지막 양말은 덩그러니 놔두는 경우가 있다 (물론 급한 사정에 아랫도리만 벗는 사람도 있고, 샤워를 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양말을 벗다가 발이 꼬이거나 미끄러져 죽울 수도 있다). morir en calcetines는 이런 상태를 뜻한다. 원문에 '알몸(desnudo, en pelotas, en cueros)'이란 말은 없지만 '양말만 신은 채 알몸으로 죽다'라고 옮겨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 아니면 '양말만 신은 채 죽다'라고 하고 주석으로 에스파냐의 문화를 설명하면 되겠다.
문학과 지성사는 '팬티만 입은 채 죽을 수도 있다'고 옮겼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 팬티는 calcetines가 아니라 calzoncillos (여자 팬티는 bragas)이다. calcetines (단수형 calcetín)는 속어 또는 은어로 콘돔(condón, preservativo)이기 때문에 원문은 이중 의미를 의도한 것일 수 있다.
'양말만 신은 채 죽는' 것은 10장에 반복된다. 빅토르는 경마장에서 친구 루이베리스에게 마르타와 있었던 일과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Él me fue escuchando con una mezcla de hilaridad y estremecimiento, como cuando leemos en los periódicos sobre la desgracia inevitablemente risible de alguien desconocido que muere en calcetines o en la peluquería con un gran babero, en un prostíbulo o en el dentista, o comiendo pescado y atravesado por una espina como los niños cuya madre no está para meterles un dedo y salvarlos....
문학과 지성사의 번역이다. 아래의 '그'는 루이베리스이다.
그는 재미있으면서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마치 알몸에 양말만 신은 채 죽었거나, 아니면 이발소에서 커다란 턱받이를 두른 채 죽었거나, 아니면 사창가나 치과에서 죽었거나, 혹은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 목에서 가시를 꺼내줄 틈도 없이 죽은 어린아이처럼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죽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때, 그런 사람의 불행을 보고 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문학과 지성사.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2014, 388-389면)
이번에는 '알몸에 양말만 신은 채 죽었거나'로 옮겼다. 1장에 '가운'으로 번역한 un gran babero를 이번에는 '커다란 턱받이'로 바르게 옮겼다. 같은 것을 이렇게 일관성 없게 번역을 한 이유는 불가사의하다.
아무튼 서술자와 인물들은 마르타를 욕되게 할 것처럼 그녀의 죽음을 우스꽝스럽고 웃음이 나오는 것으로 희화화했다. 이런 유머는 진정한 웃음이기보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빅토르의 도의적 자책이자 쾌락을 쫓는 타락한 현대인을 나무라며 자신을 꾸짖는 구누름일 것이다.
섹스와 비도덕을 넌지시 알리는 양말은 소설에 두 번 더 등장한다. 빅토르가 마르타의 장례식 참가한 3장과 빅토르와 마르타의 아버지가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는 5장에는 종류가 다른 양말이 언급된다.
아래 3장, 마르타 장례식의 매장 장면이다. 흙이 뿌려지는 묘혈 옆에 마르타의 남편 데안이 식구와 일가친지들과 함께 서 있다. 그런데 데안이 절망에 빠졌는지 다리를 비틀거리며 넘어져 구덩이 안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간신히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옆 사람의 도움으로 일어나는 순간에 매장 인부를 묘사한 것이다.
Al verle desfallecer un sepulturero se había detenido con la pala en alto, ya cargada de tierra, y durante los segundos en que el viudo reciente había interrumpido el silencio de la ceremonia la figura se quedó paralizada como si fuera una estatua obrera o tal vez minera, la pala empuñada y alzada, los pantalones anchos, unas botas bajas, un pañuelo al cuello y en la cabeza una gorra anticuada. Podía ser un fogonero, ya no hay calderas, las botas le comían sus blancos calcetines gruesos. Y cuando Deán se repuso echó al hueco la tierra aplazada.
데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매장 인부는 흙이 담긴 삽을 높이 들고 그대로 멈추었는데, 갓 홀아비가 된 데안이 장례식의 정적을 깬 짧은 순간에,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구식 모자를 쓰고 헐렁한 바지에 짧은 장화를 신은 인부는 노동자나 어쩌면 광부의 동상처럼 치켜든 삽을 움켜쥔 채 마비가 되어 굳어버렸다. 석탄을 때는 화통은 벌써 사라졌지만, 두툼한 흰 양말을 먹어 버린 장화를 신은 인부는 화부 같기도 했다. 데안이 일어서자 인부는 지체된 흙을 묘혈로 던졌다. (필자 번역).
아래는 문학과 지성사의 번역이다.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자 인부는 흙이 담긴 삽을 내려놓으려다가 멈추었고, 얼마 전에 아내를 여읜 남자는 잠시 장례식의 침묵을 깨면서 그곳에 사지가 마비된 듯이 가만히 있었다.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장화를 신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에는 옛날 모자를 쓴 채, 삽을 굳게 쥐어 올린 인부의 모습은 마치 노동자나 광부의 동상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지금은 석탄을 퍼부어야 화력이 생기는 보일러는 존재하지 않지만, 삽을 들고 있고 하얀 양말이 장화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모습은 화부(火夫)로 오인될 수도 있었다. 데안이 일어서자 그는 마침내 한 삽의 흙을 묘 구덩이로 던졌다. (문학과 지성사,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2014, 131-132쪽).
문학과 지성사는 '아내를 여읜 남자' 데안이 마비되었고 '인부'는 노동자나 광부처럼 보인다며 둘을 구분했으나, 사실 마비된 사람은 삽을 높게 든 인부이고 이 인부가 노동자나 광부처럼 보인 것이다. 인부의 양말은 하얀색이자, 문지사 번역은 생략했지만, 두터운 것이다. 이 두꺼운 양말(calcetines gruesos)은 1장에 알몸에 양말만 신고 죽은 우스꽝스러운 남자와 5장에 털이 훤히 비치는 얇은 양말을 신은 에스파냐 국왕을 대조하기 위한 의미 있는 복선이다. 두꺼운 흰 양말을 신고 씩씩하게 불을 때는 화부와 같은 인부는 양말만 신고 죽은 남자와 가는 다리에 얇은 양말을 신은 스페인 국왕과 달리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힘이 넘치며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로 재미를 보려다 죽은 비도덕적인 마르타를 매장하고 있다.
5장, 빅토르가 국왕을 접견하는 장면이다.
Solus tenía unas piernas largas y flacas que cruzó en seguida con desenvoltura (a continuación las cruzó la joven de manera mimética, tenía una carrera en la media que le daba un aire libertino, tal vez se la había hecho forcejeando con los sindicalistas o haciéndole falta a la máquina); vi que llevaba esos calcetines llamados de ejecutivo, demasiado transparentes para mi gusto, se disciernen los pelos aplastados de las pantorrillas; por lo demás, iba vestido como cualquier hombre de mundo, los pantalones un poco arrugados a la altura de los muslos.
'지존'은 약하고 길쭉한 다리를 대번 아무렇게나 꼬았다 (그러자 그를 따라 젊은 여자도 다리를 꼬았는데 스타킹에 줄이 나 있었다. 헤픈 여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아마 노동조합원들과 실랑이를 하거나 지존과 핀볼 게임을 하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지존은 정장용 양말을 신고 있었고, 너무 투명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종아리에 짓눌린 털들이 훤히 보였다. 옷은 보통 남자처럼 입었고 바지의 허벅지는 약간 구겨져 있었다. (필자 번역)
Solus는 작가가 스페인 국왕에게 부친 별칭으로 '지존'으로 옮겼고 '젊은 여자'는 국왕의 비서이다. 국왕은 독재자 프랑코가 죽은 뒤 스페인의 민주화를 실현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상왕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풍자한다. 그는 왕좌에 있을 때 아프리카에 애인과 함께 코끼리 사냥을 가는 둥 뇌물을 수수하는 둥 비자금을 형성하고 세금을 포탈한 일탈로 국민의 원성을 사 2014년 아들 펠리페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애인과 정부를 수없이 거느린 그는 여자 편력이 대단한 왕으로 밝혀졌다.
가령, 1977년 후안 카를로스가 39세일 때 러시아 외교관의 딸이자 영화배우였던 산드라 모자르보스키(Sandra Mozarwosky)가 18세의 나이로 임신을 한 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자살로 결론이 났지만 부검 결과는 사라졌고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그녀의 죽음은 비밀에 묻혀버렸지만 카를로스의 아이를 밴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미스터리하게 죽은 그녀는 국왕의 전기에 다른 여자과 함께 수록되었고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왕의 가는 다리에 얇은 양말은 3장에 화부의 두꺼운 양말과 묘한 대비가 된다. 두꺼운 양말을 신고 시뻘겋게 타오르게 불을 때는 인부에 비하면 연약한 다리에 납작해진 털이 비치는 얇은 정장용 양말을 신은 국왕은 아무 힘도 못쓸 사람 같다. 약한 남자가 권력에 힘입어 누린 영화를 조롱하고 비꼰 것이다. 스타킹 줄이 나간 여비서는 후안 카를로스의 정부인 양 재미를 더한다.
1장에 '양말만 신은 채 알몸으로 죽은' 대신 '팬티만 입은 채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3장의 '두터운 흰 양말'을 신은 인부라는 원문 정보를 누락하고 '하얀 양말'을 신은 인부라고 옮긴 문학과 지성사의 번역본을 읽는 독자는 양말과 섹스와 죽음의 알레고리와 골계미나 풍자를 즐기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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