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스페인 소설

블라스코 이바녜스 소설 <갈대와 진흙 Cañas y barro> 문학사적 의의

by brasero 2019. 2. 20.


     1867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나 1928년 프랑스 망통(Menton)에서 영면한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산 19세기말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격변의 시기였다. 그가 살았던 60여년의 세월 동안 스페인의 왕이 네 번, 이사벨 2, 아마데1, 알폰소 12, 알폰소 13세로 바뀌었고,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스페인은 국내로는 봉기에 직면하고 전쟁을 해가며 해외에서도 전쟁을 수행해야 하던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쿠바, 모로코, 필리핀 미국과 전쟁을 했다. 그리고 1914년는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1868년 스페인은 '명예혁명' 으로 1공화국의 발판을 마련했다. 블라스코 이바녜스 사후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가 물러나고 2공화국이 탄생했다.

     세기 전환의 역사적 부침에서도 두 가지 뚜렷한 사실이 당시에 대두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중산계급(부르주아)의 기반이 확고해진 반면, 호베르(Jover)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 전반에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의식'이 태동하고 발전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은 예외이지만, 스페인 전역에,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정치와 언론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듯이, 공화국 정신이 만연했다. 공화파는 의회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공화국 정부를 탄생시켜 무산계급의 집회와 단체 형성을 보호하고 권익을 지켜주었다. 1877년 사회노동당(PSOE)이 결성되었고, 1888년 노동자연맹(UGT)이 탄생했고, 1911년에는 다수의 무정부주의 단체가 활동을 했고, 1920년에는 전국노동연합(CNT)과 스페인 공산당(PCE)이 출범했다.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이사벨 2세가 마지막으로 의회를 개최한 1867년에 태어났다. 이듬해 9월 프림, 세라노와 토페토 장군이 이사벨을 폐위시키는 명예혁명을 완수했다. 이해에는 쿠바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 임시정부는 새 헌법을 공포했으나 난항을 겪다 1871년 아마데오 데 사보야(Amadeo de Saboya)를 군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1872년에는3차 카를리스타 전쟁이 일어났다. 1873년 아마데오가 폐위되고 스페인 최초로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고 초대 총리 피게라스 (Figueras) 이후 피 이 마르가예(Pi y Margall), 살메론(Salmerón), 카스텔라르(Castelar)가 총리직에 오르면서 혼란의 연속이었다. 피 이 마르가예는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정치 스승이었다. 18741월 파비아(Pavía) 장군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12월에 사군토에서 마티네스 캄포스 장군은 알폰소 12세를 복귀시키는 왕정복고를 선언하였다.

    브로봉 왕조의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른 후 1855년에 사망하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이 시작되었고 1902년에는 알폰소 13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동안 카노바스의 보수파와 카스텔라르의 자유파가 번갈가 가면서 내각을 구성했다. 1883년에 안달루시아에서 무정부주의가 기치를 떨었고 1896년 필리핀 전쟁과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 패배해 스페인의 영광이 저무는 치명상을 입었다. 19097월 모로코 전쟁에 군대 파견 문제로 촉발된 바르셀로나의 '비극의 일주일' 이 전개 되었고 1917년에는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이 혼란을 잠재운 것은 힘이 있는 군부로,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다른 예술가와 지식인들처럼 블라스코 이바녜스도 독재에 항거했고 알폰소 13세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염원했다. 다만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유명을 달리한 후 2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언급한 대로 그는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시기에 살았다. 하지만 지방과 시골의 대지주나 토호는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블라스코 이바녜스 '사회 소설(novela socia)' , 당시의 다른 사회 소설처럼 이런 세력에 비판을 날을 세웠다.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은의 시기(Edad de Plata)' 였다. 근대화와 더불어 일상과 공공의 삶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경험을 연출했다. 전등이 보급되었고, 기차, 전차, 자동차가 동물에 의존하던 교통수단을 대체했고 (1919년 마드리드에서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비행기가 출현했고 전보, 전화와 같은 새로운 통신 매체도 등장했다. 어수룩해보이던 영화도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영화 예술의 등장으로 소설가가 그리던 세계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는 평을 했다. 1917년에 그의 소설 <피와 모래 Sangre y arena>, 1921년에는 <묵시록의 네 기사 Los cuatro jinetes del Apocalipsis>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풍요로운 문화의 시대는 문맹률이 감소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증가한 것에 덕을 입었다. 1870년에 75%이던 문맹률이 1900년에는 63%1930년에는 33%로 떨어졌다. 독서 인구의 증가로 이야기 책은 수 천권의 부수가 팔렸다. 선정적인 소설을 논외로 하면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펠리페 트리고(Felipe Trigo), 호아킨 벨다(Joaquín Belda)와 함께 인기 작가였다.

    이 시기에 다양한 소설가와 관점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만개한 소설의 시기에 특히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발레라, 페레스 갈도스, 파라도 바산, 클라린 등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소설이 주도한 시기가 지나갔고, 세기말부터는 미학과 스타일 다른 작가들이 출현했다.

    20세기 초기에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극과 소설이 비록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특히 멜로드라마, 사라수엘라(género chico)의 관객이 넘쳤고 에로 소설, 모험 소설, 탐정 소설 등이 많은 독자를 이목을 끌었다.

    동시에 일군의 세기말 작가들은 이전 새대와 단절을 꾀하며 변화를 부르짖었다. 스페인의 세기말 몰락을 목격한 작가들은 '98세대' 정신 또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 상징주의, 데카당스, 영국의 라파엘 전파, 접신론 등이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여명이 트자 말자 1902년에 과거와 전혀 다른 경향의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들은 시공간, 인물, 행위, 언어와 실제의 인식이 이전 스페인 소설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거대한 유럽의 소설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우나무노의 <사랑과 교육 Amor y pedagogía>, 마르티네스 루이스 (아소린이란 필명을 사용하기 전)<의지 La voluntad>, 피오 바로하의 <완전한 길 Camino de perfección> 바예 인클란의 <가을 소나타 Sonata de otoño> 가 그런 소설이었다. 이 소설들이 20세기를 소설이 나아갈 길을 열었고, 이후 미로(Miró), 페레스 데 아얄라(Pérez de Ayala), 페르난데스 플로레스(Fernández Flórez) 가 가세하여 길은 풍만해졌고 이렇게 전위예술적 실험 소설까지 여정이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소설은 어떤가? 자연주의로 보면 될까. 아니다.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언급한 네 사람의 소설가들와 같이 스페인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로 봐야한다. 앞서 말한 네 소설이 발표된 1902년에 출간한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갈대와 진흙 Cañas y barro>은 스페인 문학의 방위각을 새롭게 정립한 소설이다. 모더니즘적 실험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주의 미학을 계승하면서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주관성을 배제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상징주의가 가미되어 이 소설은 세기를 여는 새로운 미학을 개척했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올레사(Oleza)가 지적한 대로 이바녜스는 내전 이전과 1950년대의 '사회 소설'을 개척한 리얼리즘을 구사한 근대성을 확립한 것에 의의가 있다.